이것이 나의 저녁이라면 (외 2편)
김행숙
신발장의 모든 구두를 꺼내 등잔처럼 강물에 띄우겠습니다
물에 젖어 세상에서 가장 무거워진 구두를 위해 슬피 울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신발이 없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나는 국가도 없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이것이 나의 저녁이라면 그 곁에서 밤이 슬금슬금 기어나오고 있습니다
기억의 국정화가 선고되었습니다
책들이 불타는 밤입니다
말들이 파도처럼 부서지고
긁어모은 낙엽처럼 한꺼번에 불타오르는 밤, 뜨거운 악몽처럼 이것이 나의 밤이라면 저 멀리서 아침이 오고 있습니다
드디어 아침 햇빛이 내 눈을 찌르는 순간에 검은 보석같이 문맹자가 되겠습니다
사로잡히지 않는 눈빛이 되겠습니다
의무가 없어진 사람이 되겠습니다
오직 이것만이 나의 아침이라면 더 깊어지는 악몽처럼 구두가 물에 가라앉고 있습니다
눈을 씻어도 내 신발을 찾을 수 없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서서히 돌부리나 멧돼지가 되겠습니다
무의식을 지켜라
무의식은 무한하고 나는 유한한데
이제 내 신발 밑에서는 한 개의 그림자도 새어나오지 않아요.
무의식은 보이지 않고 나는 보이는데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지킵니까?
나는 꿈도 꾸지 못하고 헛소리도 하지 못해요.
꿈을 꾸지 못해서 잠을 자지도 못해요.
얼마나 높은 곳에 오르면 무의식이 보입니까?
그곳에 누가 있어서 무의식을 씻기고 먹이고 새어머니 노릇까지 합니까?
무의식에 손대는 그 손은 얼마나 거대합니까?
오늘날 신적인 것은 어떻게 스스로를 드러냅니까?
무의식의 엄마가 나의 폭군이라면
무의식의 친지들이 내가 문 앞에서 쫓아낸 이방인들이라면
무의식의 적이 나의 친구들이라면
그래도 나는 무의식을 몰라요.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
나는 간첩을 몰라요.
제발 살려주세요. 눈이 내리는 1월에도, 눈이 녹는 1월에도 나는 세금을 냈어요.
그날 눈 쌓인 새벽 골목길에 내 발자국이 푹푹 찍혀도
나는 정말 나를 몰라요.
주어 없는 꿈
어떻게 하면, 당신이 원하는 꿈을 꿀 수 있을까? 물결처럼 베개를 높이고, 낮추고……
나는 당신이 꾸는 꿈을 꾸고 싶다. 밤새 내가 하는 일은 잠든 당신의 얼굴을 뜯어보듯 관찰하며, 파고들듯 탐구하며……
당신이 모르는 당신의 얼굴을…… 파헤치고 싶다.
삶이 우리를 서서히 갈라놓았다면 죽음은 우리를 와락 끌어안을 것이다. 삶이 죽음을 모르는 만큼 죽음도 삶을 모르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단단한 씨앗 속으로 다시 들어가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다른 곳에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뿌리가 제 꽃을 모르는 만큼 꽃도 제 뿌리를 모르는 것이다. 그것은 별빛이 별빛에 닿듯 까마득히 먼 거리인 것이다.
당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느껴보았다. 쿵, 쿵, 쿵……
계속, 계속해서 그것은 이쪽으로 다가오는 중이다. 오른발이 없어지는 동안에 왼발이 생기네, 왼발이 없어지는 동안에 오른발이 생기네, 오른발이 없어지는 동안에……
쿵, 쿵, 쿵…… 그것은 폭설처럼 거칠고 깊은 잠에 빠진 어느 마을을 빗장처럼 가로지르며 홀로 걸어가는 복면한 도둑과 같은 것이다. 계속, 계속, 계속해서 그것은 저쪽으로 걸어가는 중이다.
훔친 물건을 되돌려주기 위해 다음 날 밤을 기다리게 될 도둑이 있었을 것이다. 내일은, 내일은……
어떻게 하면, 당신의 담장을 넘어 당신이 원치 않는 꿈을 꿀 수 있을까? 당신의 목구멍을 긁으며 마침내 빠져나오는…… 저 한 자루 과도에서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달콤한 액체를 나는 맛보고 싶다.
과연 당신은 그곳에 무슨 열매를 깎아놓았을까. 나는 당신이 꾸는 꿈을 꾸고 싶다.
당신의 꿈속에서 내가 모르는 내 얼굴을…… 죽이고 싶다. 붉은 껍질을, 붉은 껍질을…… 하염없이 떨어뜨리고 싶다.
꿈속에서 나는 늘 진지했다. 꿈속에서 나는 한 번도 농담을 한 적이 없다.
— 2016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유리의 존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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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숙 /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국어교육학과와 동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여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집으로 『사춘기』 『이별의 능력』 『타인의 의미』 『에코의 초상』을 펴냈고, 그 밖에『문학이란 무엇이었는가』 『창조와 폐허를 가로지르다』 『마주침의 발명』 『에로스와 아우라』 등의 책을 썼다. 2016년 현재 강남대 국문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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