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나, 덤으로/황인숙 시인 시편 모음

김욱진 2017. 1. 2. 18:58

 

나, 덤으로 / 황인숙

 

나, 지금

덤으로 살고 있는 것 같아

그런 것만 같아

나, 삭정이 끝에

무슨 실수로 얹힌

푸르죽죽한 순만 같아

나, 자꾸 기다리네

누구, 나, 툭 꺾으면

물기 하나 없는 줄거리 보고

기겁하여 팽개칠거야

나, 지금

삭정이인 것 같아

핏톨들은 가랑잎으로 쓸려다니고

아, 나, 기다림을

끌어당기고

싶네

 


 

후회 / 황인숙 


깊고 깊어라.
행동 뒤의 나의 생각.
내 혀는 마음보다
정직했으니.

 

 

 

응시 / 황인숙
 

내 귀는 네 마음속에 있다.

그러니 어찌 네가 편할 것인가.

그리고 내게

네 마음밖에 그 무엇이 들리겠는가.

 

 

 

마침표 / 황인숙


찍는 것이지요.
그리는 게 아니구요.
질질 끄는 게 아니어요.


 

 

비 / 황인숙

 

저처럼

종종 걸음으로

나도

누군가를

찾아나서고

싶다

 

 

 

비 / 황인숙


찰박거리는 맨발들.
찰박 찰박 찰박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쉬지 않고 찰박 걷는
티눈 하나 없는
작은 발들.
맨발로 끼어들고 싶게 하는

 

 

 

꿈 / 황인숙

 

가끔 네 꿈을 꾼다.
전에는 꿈이라도 꿈인 줄 모르겠더니
이제는 너를 보면
아, 꿈이로구나.
알아챈다.

 

 

 

희망 / 황인숙
 

어제가 좋았다
오늘도 어제가 좋았다
어제가 좋았다, 매일
내일도 어제가 좋을 것이다.

 


 

바람 부는 날이면 / 황인숙


아아 남자들은 모르리
벌판을 뒤흔드는
저 바람 속에 뛰어들면


가슴 위까지 치솟아 오르네
스커트 자락의 상쾌!

 

 

 

졸음 / 황인숙

  

달팽이 시내를 건넙니다
달팽이 시내를 건넙니다
달팽이 시내를 건넙니다


달팽이 종일토록 시내를 건넙니다.


유리창 위에 달팽이 한 마리.
종일토록 시내를 건넙니다.

 

 

11월 / 황인숙 
   
납물처럼 떨어지는 빗줄기 속.
온종일 슈퍼마켓 처마 밑에서
발이 저리도록 쪼그리고 앉아
지나가는 이들의 구두코를 바라보던
거지 아이의 마음을, 은전 한 닢,
햇빛으로 주조한 것인 양
따스하게 하네.

 

 

 

남산, 11월 / 황인숙


단풍 든 나무의 겨드랑이에 햇빛이 있다. 왼편, 오른편.
햇빛은 단풍 든 나무의 앞에 있고 뒤에도 있다.
우듬지에 있고 가슴께에 있고 뿌리께에 있다.
단풍 든 나무의 안과 밖, 이파리들, 속이파리,
사이사이, 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가 있다.
 
단풍 든 나무가 문을 활짝 열어제치고 있다.
단풍 든 나무가 한없이 붉고, 노랗고 한없이 환하다.
그지없이 맑고 그지없이 순하고 그지없이 따스하다.
단풍 든 나무가 햇빛을 담쑥 안고 있다.
행복에 겨워 찰랑거리며.
 
싸늘한 바람이 뒤바람이
햇빛을 켠 단풍나무 주위를 쉴새없이 서성인다.
이 벤치 저 벤치에서 남자들이
가랑잎처럼 꼬부리고 잠을 자고 있다.

 

 


자유로 / 황인숙

 

나는 아무의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구절초처럼 빛나는 혈통에 대한

간도 쓸개도 없이

 

멍하니 기가 죽어 살고 있다.

 

나는 타락했다.

내가 아무의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피의 계율을 잊었기 때문에.

 

 

 

비유에 바침 / 황인숙


나는 아직 무사히 쓸쓸하고
내 쓸쓸함도 무사하다네.


하루가 얼마나 짤막한지
알지 못했다면
단 하룬들
참지 못했으리.


배를 타려 하네.
섬.
깊은 독서 끝에
처박혀지는.


나는 아직 무사히 쓸쓸하고.
왜냐하면 그저 그거인 나날,
그러나 비유는 다채롭기에.
 
 

 

추운 얼굴로 웃으며 / 황인숙 
   
차가운 안개비 속에서 팽팽히
꽃들은 시들지도 못했다.
노랑과 빨강, 분홍 튤립들
보랏빛 히야신스
은방울꽃들의 하양.
사람들은 그 사이를
추운 얼굴로 웃으며 거닐었다.
이따금씩 해의 행방을 찾아
회색 하늘 속을 기웃거리며.
빗방울이 굵어졌다.
꽃향기가 방울져 흩어졌다.
어떤 이들은 우산을 펴 쓰고
우리는 지붕 밑을 향해 뛰었다.
손등으로 얼굴을 쓸어 닦으며
너는 맥주를 마셨다.
합석한 노인들은 달콤해 보이는 빵과 함께
김이 오르는 커피를 마셨다.
창밖에는 꽃들이
추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모든 꿈은 성적이다 / 황인숙 


나는 터덜터덜
잡초가 함부로 자란 길을 걷고 있었다.
하늘엔 암소 구름이 굼뜨게 움직이고 있었다.
목이 좀 마른 듯했다.
그 아름 고목 밑둥은
이 빠진 항아리처럼 덤불 속에 던져져 있었다.
무엇이 움직이는 듯해서 나는 다가갔다.
고목 밑둥에서 잔가지가 자라났다.
갈색 사슴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 사슴의 한쪽 눈은 나무 옹이로 되어 있었다.
반은 나무인 사슴이 비비적거리며 나무 구멍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슴이 드러나자 나는 그것이 올빼미인 것을 알아챘다.
푸드덕거리며 올빼미는 날아올랐다
날아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것이 사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무 옹이 눈을 가진 사슴은 나를 한번 힐끗 돌아보고
절뚝거리듯이 날아, 뛰어 달아났다.
사방이 찌르듯 조용했다.
내 얘기를 들으신 프로이트 선생님께서는
자신만만하게 풀이하신다.
"모든 꿈은
성적인 것이야"
단성사 근처
핫 댄스 곡이 꽝꽝 울리는
복작복작한 커피점에서.

 

 

 

비 온 가을 아침 / 황인숙


블록 담벼락은 젖어 있었다.
남은 잎새를 마저 던지고
튤립나무는 우두커니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길바닥은 노란 잎들을
힘껏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 남자는 튤립나무보다
더 벗고 있었다.
주름살을 기묘히 구겨
갓난애의 얼굴을 하고
후들후들 떨며
행인들의 눈치를 보며
먼 유년을
놀고 있었다.

 


 

그때는 설레었지요 / 황인숙

 
그때는 밤이 되면
설레어 가만히
집 안에 있을 수 없었지요


어둠이 겹주름 속에
감추었다 꺼내고
감추었다 꺼냈지요, 만물을


바람이 어둠 속을 달리면
나는 삶을 파랗게
느낄 수 있었어요
움직였지요
삶이 움직였지요
빌딩도 가로수도
살금살금 움직였지요
적란운도 숲처럼 움직였지요


나는 만물이 움직이는 것을
자세히 보려고 가끔 발을 멈췄어요
그러면 그들은 움직임을 멈췄어요


그들은 나보다
한 발 뒤에 움직였어요
달린다, 달린다,
움직인다, 움직인다,
우리는 움직임으로 껴안았지요


그때는 밤이 되면
설레어 가만히
집 안에 있을 수 없었어요


바람이 어둠 속을 달립니다
전신이 팔다리예요
바람이 자기의 달림을
내 몸이 느끼도록
어둠 속에서 망토를 펄럭입니다
나는 집 안에서
귀기울여 듣습니다
바람은 달립니다
어둠의 겹주름 속을


그때는
밤이 되면
설레어 가만히
집 안에 있을 수
없었지요

 


 

산오름 / 황인숙

 

친구와 북한산 자락을 오른다

나는 숨이 찰 정도로 빨리 걷고

친구는 느릿느릿,

그의 기척이 이내 아득하다

나는 친구에게 돌아가 걸음을 재촉한다

그러기를 몇 번, 기어이 친구가 화를 낸다

산엘 왔으면, 나무도 보고 돌도 보고

풀도 보고 구름도 보면서 걷는 법이지

걸어치우려 드느냐고

아하!

친구처럼 주위를 둘러보며 걸으려는데

어느 새 획획 산을 오르게 되는 나다

땀을 뚝뚝 흘리며 바위에 앉아 내려다보면

멀리서 친구가 느릿느릿 올라온다

나무도 데리고 돌도 데리고

풀도 데리고 구름도 데리고.

 

 

 

묵지룩히 눈이 올 듯한 밤 / 황인숙 


이렇게 피곤한데
깊은 밤이어서
집 앞 골목이어서
무뚝뚝이 걸어도 되는 혼자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죽을 것같이 피곤하다고
피곤하다고
걸음, 걸음, 중얼거리다
등줄기를 한껏 펴고 다리를 쭉 뻗었다
이렇게 피곤한 채 죽으면
영원히 피곤할 것만 같아서
그것이 문득 두려워서


죽고 싶도록 슬프다는 친구여
죽을 것같이 슬퍼하는 친구여
지금 해줄 얘기는 이뿐이다
내가 켜 든 이 옹색한 전지 불빛에
生은, 명료해지는 대신
윤기를 잃을까 또 두렵다.

 

 

강 /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 이인성의 소설 제목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에서 차용

 


 

 

세상의 모든 비탈* / 황인숙

  

걷는 게 고역일 때

길이란

해치워야 할

'거리'일 뿐이다

사는 게 노역일 때 삶이

해치워야 할

'시간'일 뿐이듯

  

하필이면 비탈 동네

폐지를 모으는 할머니들

오늘 밤도 묵묵히

납작한 바퀴 위에

둥드러시 높다랗게 비탈을 싣고 나른다

비에 젖으면 몇 곱 더 무거워지는 그 비탈

가파른 비탈 아래

납작한 할머니들.

 

 

* KBS 문화스페셜 '세상의 모든 라면박스'에서 차용.

 

 

 

하늘꽃 / 황인숙

  

날씨의 절세가인입니다

얼마나,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이 텅 비는 것 같습니다

앞서 떨어지는 눈송이들에 걸려

뒷눈송이들이 둥둥 떠 있는

하늘까지 까마득한 대열입니다

저 너머 깊은 天空에서

어리어리한 별들이 빨려들어

함께 쏟아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빨려들어

어디론가 쏟아져버릴 것 같습니다

모든 상념이 빠져나간 하양입니다

모든 소리를 삼키고

하얗게 쏟아지는 눈 오는 소리

나를 호리는 발성입니다

  

몇 걸음마다 멈춰 서

묵직해진 우산을 뒤집어 털어

길 위에 눈을 돌려줬습니다

계단골이 안 보이도록 쌓인 눈

아무 데나 딛고 올라가려니

자꾸만 웃음이 비어져 나옵니다

내 방에 들어서 문을 닫으니

호주머니 속에 눈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꿈에 깨다 / 황인숙

 

그것은 마른 꽃잎처럼

얇고 아주 가볍다.

 

쓰디쓴 수액으로

아리고 통통하던

때도 지나고

 

이제 기억에도 없다.

 

물결에 흘러가다

찰나, 어른거렸는데

 

모르겠다.

언제였는지, 왜 그랬었는지,

그러기는 그랬었는지,

모르겠다.

누구였는지, 나였는지

대체 무슨 일이었는지.

 

꿈을 꾸기는 꾼 것인지.

 

 

 

아직도 햇빛이 눈을 부시게 한다 / 황인숙
 

버스가 모퉁이를 도는 순간
햇빛이 유리창처럼 떨어졌다.
아찔!
나무가 새겨진다.
햇빛이 미세하게
벚꽃을 깎아낸다.
벚꽃들, 뭉게뭉게 벚꽃들.


청남빛 그늘 위의
희디흰 눈꺼풀들.
부셔하는 눈꺼풀들.


네게도 벚꽃의 계절이 있었다.
물론 내게도.

 


 

젖은 혀, 마른 혀 / 황인숙

 
바람의 축축한 혀가
측백나무와 그 아래 수수꽃다리를 핥으면
측백나무와 수수꽃다리는
슬며시 눈을 뜨고
측백나무와 수수꽃다리로 깨어난다
 

바람의 마른 혀가
측백나무와 수수꽃다리로 깨어난
측백나무와 수수꽃다리를 핥으면
측백나무와 수수꽃다리는
스스로 눈을 감고
측백나무와 수수꽃다리로 잠이 든다
영혼이 펄럭이며 잘 마르는 날.

 

 

 

늙은 건달 불루스 / 황인숙


돈은 다 떨어지고
마음은 옹졸해졌네,
엄마와 대판 싸우고 집을 나오니
갈 곳이 없구나.
이 공원 저 벤치
저 버스 이 지하철을 헤매는데
개나리 진달래 만발했도다.
하! 공복통처럼
만건곤한 봄날

 

 

 

삶의 시간을 길게하는 슬픔 / 황인숙 
  

나이는 서른 다섯 살.
가을도 저물어 시린 바람이 안팎으로 몰아친다.
이제는 더 이상 청춘도 없다. 사랑도.


밤은 막막, 낮은 휑휑.
그렇지만,
죽음보다는 따뜻하다.


앙다문 이빨.
눈꺼풀 저 구석에 지그시 눌러둔
쓰라린 눈알.
억울해? 억울하지.


억울함을 딛고 비참을 딛고
생이 몰아치는 공포를 딛고
딛고, 딛고!


오, 추락하는 꿈으로도
오, 따분한 꿈으로도
오, 처량한 꿈으로도
비비틀리는, 푸드덕거리는
몸은 작열한다!


죽은 몸에는
눈먼 꿈도 깃들이지 않는다네.
당신을 저버린 연인이 무섭게 차갑다고?
죽음보다는 따뜻하다.

 


 

양생 / 황인숙

 
햇빛이 구름을 터트리고
과즙처럼 튄다.
나무들이 일제히 치이익!
산소를 뿜어댈 때
싱싱하고 싱싱한 나무들.
활씬 두팔을 벌리고
껴안자꾸나.
그의 서늘한 가슴에
가슴을 대자꾸나.
쿵! 쿵! 쿵!
나무의 심장을 지나
수액의 흐름을 따라
굳건히 뿌리에 뿌리를 내리고
그리고 우듬지로 치솟아
오, 저처럼!
상쾌히 상체를 젖히고
머리를 흔들어 보자꾸나!

 

 

황인숙 1958년 서울 출생. 1984년〈경향신문〉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슬픔이 나를 깨운다』『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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