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공양 외 5편/안도현

김욱진 2010. 10. 27. 09:29

공양

 

 

 

  싸리꽃을 애무하는 산(山)벌의 날갯짓소리 일곱 근

 

  몰래 숨어 퍼뜨리는 칡꽃 향기 육십평

 

  꽃잎 열기 이틀 전 백도라지 줄기의 슬픈 미동(微動)두 치 반

 

  외딴집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의 오랏줄 칠만천 발

 

  한 차례 숨죽였다가 다시 우는 매미울음 서른 되

 

 

 

 

독거

 

  안도현

 

 

  나는 능선을 타고 앉은 저 구름의 독거(獨居)를 사랑하련다

 

  염소떼처럼 풀 뜯는 시늉을 하는 것과 흰 수염을 길렀다는 것이 구름의 흠이긴 하지만,

 

  잠시 전투기를 과자처럼 깨물어먹다가 뱉으며, 너무 딱딱하다고, 투덜거리는 것도 썩 좋아하고

 

  그가 저수지의 빈 술잔을 채워주는데 인색하지 않은 것도 좋아한다, 떠나고 싶을 때 능선의 옆구리를 발로 툭 차버리고 떠나는 것도 좋아한다

 

  이 세상의 방명록에 이름 석 자 적는 것을 한사코 싫어하는,

 

  무엇보다 위로 치솟지 아니하며 옆으로 다리를 쭉 펴고 앉아, 대통령도 수도승도 아니어서 통장의 잔고를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저 구름,

 

  보아라, 백로 한 마리가 천천히 허공이 될 때까지 허공이 더 천천히 저녁 어스름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까지 우두커니 앉아 바라보기만  하는

 

  저 구름은, 바라보는 일이 직업이다

 

  혼자 울어보지도 못하고 혼자 밤을 새보지도 못하고 혼자 죽어보지도 못한 나는 그래서 끝끝내,

 

  저 구름의 독거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빗소리

 

 

  저녁 먹기 직전인데 마당이 왁자지껄하다

 

  문 열어보니 빗줄기가 백만대군을 이끌고 와서 진을 치고 있다

 

  둥근 투구를 쓴 군사들의 발소리가 마치 빗소리 같다

 

  부엌에서 밥 끓는 냄새가 툇마루로 기어올라온다

 

  왜 빗소리는 와서 저녁을 이리도 걸게 한상 차렸는가

 

  나는 빗소리가 섭섭하지 않게 마당 쪽으로 오래 귀를 열어둔다

 

  그리고 낮에 본 무릎 꺾인 어린 방아깨비의 안부를 궁금해한다

 

 

 

공부

 

 

  황조롱이 한 마리 공중에 떴다, 16층 창밖에 정지상태다

  내 눈썹 높이와 한치 어김없는 일직선이다

  생각하니, 허공에 걸린 또 하나의 팽팽한 눈썹이다

  이 놓이까지 상승기류를 타고 그는 순식간에 떠올랐겠으나

  엘리베이터에 휘청휘청 실려온 나, 미안하고 또 괜히 무안하다

  그는 왼쪽에서 미는 구름과 오른쪽에서 미는 구름을 양 날개 속에 숨겼다

  위에서 내리누르는 바람과 아래에서 떠받치는 바람을 발톱 끝에 말아쥐었다

  그는 침묵하고 있다,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부리는 더욱 단단해지고 날카로워졌다

  나는 낡아가는데,

  그는 오만한 독학생 같다

  세상의 책에다 밑줄 하나 긋지않고 있다, 밑줄 같은 건

 먼 산맥의 능선과 굽이치는 강물에다 일찌감치 다 그어두었다는 듯

  그는 날쌘 황조롱이, 나는 조롱 한번 해보지 못하고 쭈글쭈글해졌다

  별을 따기  위해 홀로 빛나기 위해 하늘의 열매를 탐해 공중에 뜬게 아니다 그는

  벽을 치고 창을 달고 앉아 있는 나하고는 상관없이

  내리꽂힌다, 시속 이백 킬로미터나 되는 속도로, 땅위의 한 마리 들쥐 때문이 아니라

  내리꽂혀야 하므로, 나를 조롱하듯 그는 내리꽂힌다

 

 

 

 조문(弔文)

 

 

 

  뒷집 조성오 할아버지가 겨울에 돌아가셨다

  감나무 두 그루 딸린 빈집만 남겨두고 돌아가셨다

 

  살아서 눈 어두운 동네 노인들 편지 읽어주고 먼저 떠난 이들 묏자리도 더러 봐주고 추석 가까워지면 동네 초입의 풀 환하게 베고 물꼬싸움 나면 양쪽 불러다 누가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심판봐주던

 

  이 동네의 길이었다, 할아버지는

  슬프도록 야문 길이었다

 

  돌아가셨을 때 문상도 못한 나는 마루 끝에 앉아, 할아버지네 고추밭으로 올라가는 비탈, 오래 보고 있다

 

  지게  지고 하루에도 몇번씩 할아버지가 오르내릴 때

  풀들은 옆으로 슬쩍 비켜앉아 지그재그로 길을 터주곤 했다

 

  비탈에 납작하게 달라붙어 있던 그 길은 여름 내내

  바지 걷어붙인 할아버지 정강이에 볼록하게 돋던 핏줄 같이 파르스름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비탈길을 힘겹게 밟고 올라가던

  느린 발소리와 끙, 하던 안간힘까지 돌아가시고 나자

  그만

 

  길도 돌아가시고 말았다

 

  풀들이 우북하게 수의를 해 입힌 길,

  지금은 길이라고 할 수 없는 길 위로

  조의를 표하듯 산그늘이 엎드려 절하는 저녁이다

 

 

 

 

오래된 발자국

 

 

  시골 서점 책꽂이에 아주 오랜  시간 꽂혀 잇는 시집이 있다

 

  출간된 지 몇해째 아무도 펼쳐보지 않은 시집이다

  시인이 죽은 뒤에도 꼿꼿이 그 자리에 꽂혀 살아 있다

  나는 그 시인의 고독한 애독자를 안다

  본문은 펼쳐 읽지 못하고 제목만 뚫어지게 바라보던

  날마다 시집 귀퉁이만 밟아보다가 돌아서던 그를 안다

  햇볕의 발자국을 가진 사람을 안다

 

 

 

 

쇄빙선

 

 

  하체를 땅에 묻고 사는 사내가 있다

  

  마치 북극바다의 얼음을 가르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쇄빙선같다

 

  왜 아랫도리를 보여주지 않을까, 궁금하였으나 한번도  땅에서 몸을 빼내 보여준 적 없다

 

  허리 밑 전체가 땅에 꽂혀  있는 그를 물푸레나무라고 불러야 할까

 

  독야청청 걸어다니는 그의 가지 끝에 고무줄구름 이쑤시게구름 머리핀구름이 흔들린다 할까

 

  그는 땅을 양쪽으로 가르며 시장바닥을 헤쳐가고 있다

 

  두 팔을 휘두르며 물속에 잠긴 몸을 움직이는 것처럼 장거리 수영선수처럼

 

  비천한 세상을 천천히 끌고 다니는 사내가 있다

 

 

 

<간절하게 참 철없이- 2008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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