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꽃
사윤수
폭우는 허공에서 땅 쪽으로 격렬히 꽃피우는 방식이다 나는 비의 뿌리와 이파리를 본 적이 없다 일체가 투명한 줄기들, 야위어 야위어 쏟아진다 빗줄기는 현악기를 닮았으나 타악기 기질을 가진 수생식물이다 꽃을 피우기 위해 비에겐 나비가 아니라 허공을 버리는 순간이 필요한 것 두두두두두두 타닥타닥타닥 끊임없이 현이 끊어지는 소리, 불꽃이 메마른 가지를 거세게 태울 때의 비명이 거기서 들린다 꽃무릇의 핏물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뺐다고 치자 그게 백혈병을 앓는 군락지처럼 줄기차게 거꾸로 드리우는 것이 폭우다 추락의 끝에서 단 한 순간 피고 지는 비꽃 낮게 낮게 낱낱이 소멸하는 비의 꽃잎들,
그 꽃 한 아름 꺾어 화병에 꽂으려는 습관을 아직 버리지 못했다.
―계간 『시와 경계』 (201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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