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수상작

제3회 미당문학 신인 작품상-돌탑 외 4편/ 김건희

김욱진 2018. 11. 19. 16:26

                돌탑

                김건희


노을의 혀가 차오르는 강물에게 건네는 말

차곡차곡 씹어 올리다 보면

돌탑이 된다


닳아 가는 말 알아들어

포개어지는 말 알아들어

한 권의 시집을 엮을 수 있다면

내 입술은 너의 바닥을 제대로 읽었다 말할 수 있으리

 

너로부터 닫혀 있는 나, 나로부터 닫혀 있는 너

노을 서성이는 강가에서

서로의 등에 얽힌 사연을 들춰

어떤 돌은 너를 닮았다고

어떤 돌은 나를 닮았다고

 

흘러서 또 어디로 떠나는 물에게

중얼거림을 하나 더 보탠다


아래위 구분되지 않는 탑을

우리는 그렇게 무던히 쌓기도 하고

하염없이

허물기도 하는 거였다

   


          모래화가

    

울퉁불퉁한 생각들은

눌러 밟고 걷기보다는

떨어진 솔방울인 듯 툭툭 걷어차야 한다

그건 오랜 관습, 바람이 메마른 솔잎 걷어 내자

모래 위 걸어가는 낙타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맨발로 앞서 가던 낙타는 보이지 않고

서두르지 않았는데 저녁은

발자국을 움푹하게 찍었다

사막을 걷는 일상, 등에 진 외로움 때문에

십 리 밖 물 냄새에도 나는 예민해졌다

밖을 뒤집어 안으로 밀어 넣거나

안을 뒤집어 쌓는 화폭

나는 누군가 지나간 문양을 발끝으로 지우는 화가였다

슬며시 몸 돌려 바라본 모래 위

고통과 나란히 찍힌 내 발자국은

가벼운 바람조차 이기지 못하고 사그라진다

지난겨울 폭설로 고요했을 이곳에

낮게 누워 있는 낙타 한 마리

모이통 헐렁한 새를 만나

침침한 눈 부빈다

 

 

        물총새를 날리다

    

방금 눈을 뜬 어린 물총새가 갸웃갸웃

수초는 밀가루 뒤집어쓰고 소낙비에 젖어

철없이 첨벙거리던 발목으로 새알 수제비인 듯

비벼졌다


보글보글한 생각들을 강둑에 내려놓는다

 

이끼 젖은 바위는 아직도 잠결

머리 안쪽에서 물총새를 꺼낼 때 번개처럼 생각의 물살은

어슷썰기를 할까, 채썰기를 할까

칼등의 무거움도 아래로 흐른다

 

눈대중으로 크기를 재어보는 거긴

주방 저울 눈금이 이리저리 흔드는 강

 

금을 밟은 물안개 뒤에서 기웃거리는 햇살이

물총새를 내 모습으로 볼 때

꺼내온 묵상들로 아침상 차리는 그녀

흘러든 하구는 둥글게 끓는 밥솥이다


흔들자, 푸시시 푸시시 떠나는 군단

이팝나무 꽃자리도 불안한 침묵에

안개는 어떤 발소리도 들려주지 않았다

 

막사발에 뜸 들여 퍼 올린 쌀밥이

조리사의 하얀 가운을 자꾸 빌려 달라 조르자

냅다, 미끄덩한 껍질의 후미를 던진다

 

떠나는 물총새는 소실점을

저 혼자 지운다

 

    

      머나먼 득음

    

수양버드나무에게

높은 쪽을 깨우는 가지가 있어

바닥의 뿌리는 가렵다

 

하늘은 아직 내 악보가 아니라는 걸

안다, 발아래 토해 놓은 말없음표

냉동감옥이 아직은

내 악보일 뿐이다

 

가득 낀 녹조를 부둥켜안고 살아온 내가

길 잃은 강물에서 청둥오리로 놀다

동그랗게 번지는 파문

 

무섭게 날개 죽지를 터는

몸의 그 허공으로

모터보트는 요란하게 지나갔다

 

눌려있던 얼음 빛 울음도

하늘 쪽 마른 가지 저절로

꽝꽝 터질 날 올 거라며

버드나무는 언 입술로 거든다

 

여린 것들에게 초유를 먹이려

잔뜩 부풀리는 유선

 

   

         꽃의 자리 

    

나갔던 상여가 꽃으로 돌아오는 곳에

벌통을 놓아둔다

 

눈꺼풀조차 가벼운가요? 거긴

 

꽁꽁 언 입술 어머니

자식위해 꽃가루 나르던

그 들길 건너 야산에는 지금

눈조차 온통 시큰한 흰 섬

 

어머니 지금

항로를 놓치고 다시 회항하고 싶었던 걸까요

울음으로 놓던 다리를 지상으로 펼친 곳에서

무덕무덕 피어나는 아카시아 꽃

 

먼 길 휘어져가며 흘린 눈물이

배꼽에서 소실점을 꺼낼 때

어머니 놓던 벌통을 이제

내가 놓을 때

 

상여집 앞에 펄럭이는

흰 부적들

 

            눈사람

    

올 나간 스타킹을 당기는데

눈송이들이 딸려 나왔다

 

눈은, 저녁에야 돌아온다고 했다

 

하루가 힘겨운 히말라야시다가 먼저 젖었다

 

참새들이 잠들기 위해 찾아드는 나무였는데

눈덮고 귀덮도 코덮고 입덮어

어깨 무거운 석불이 되어 있었다

 

깊어가는 상념의 앞가슴 합장한 두 손의 가지런함에

히말라야시다, 그녀의 저녁은

끊임없이 송이눈 뭉쳐 눈을 닦는다

 

나무의 무거워진 횡격막 아래에서

솜뭉치 헤집고 열리는 노란 가슴

들숨과 날숨으로 피운 복수초가

어미닭 뱃속 알처럼 웅크렸다

 

곱은 내 손에 놓이는 한 공기 쌀밥의 따스함을

난 오래 기억할 거야

 

올이 나간 밥주머니를 잘라 낸 당신

 

비틀비틀 귀가할 저녁의 빙판길에

나 반가운 눈사람이 되어 서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