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열어주세요
나희덕
옆구리에 열쇠구멍이 있을 거예요
찾아보세요. 예, 거기에
열쇠를 꽂아주세요.
아니면 태엽이라도 감아주세요.
여기 계속 서 있는 건
아무래도 너무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몇 걸음이라도 걸어야 살 것 같아요.
열쇠를 찾을 수 없다구요?
당신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있잖아요.
손가락보다 더 좋은 열쇠는 드물죠.
때로는 붓이 되기도 하고 칼이 되기도 하는 손,
지문의 소용돌이를
열쇠구멍의 어둠 속에 가만히 대보세요.
아, 드디어 열렸군요.
이제 구멍 밖으로 걸어갈 수 있겠네요.
태엽을 넉넉히 감아주세요.
염려하지 마세요, 곧 돌아올 테니까요.
궤도를 벗어나지도 않을게요.
내 구두에는 스프링이 달려 있어
통, 통, 튀어올랐다가 이내 가라앉고 말지요.
혹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눈 먼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줄 아세요.
당신의 인형이라는 것도 잊은 채
땅에 코를 박고 허둥거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다시 일으켜 줄 어떤 손을 기다리면서, 처음인 것처럼.
- 『시인세계』2010.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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