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시인 지렁이 씨 / 김소연

김욱진 2020. 9. 23. 13:48

시인 지렁이 씨

김소연

 

 

가늘고 게으른 비가 오래도록 온다

숨어 있던 지렁이 씨 몇몇이 기어나왔다

꿈틀꿈틀 상처를 진흙탕에 부벼댄다

파문이 인다

시커멓고 넓적한 우주에서

이 지구는 수박씨보다 작고,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지렁이 씨의 꿈틀거림도 파문을 만든다

광활한 우주를 지름길로 떠돌다 돌아온 빗방울에는

한세상 무지렁이처럼 살다 간 자들의 눈물이 포함되어 있다

 

그 눈물이 파문을 만든다

빗방울도 파문을 만든다

이토록 오랜 비도 언젠가는 그치리라

 

…그러면?

그러면 지렁이 씨들의 꿈틀꿈틀, 생애 전체가 환부인 꿈틀꿈틀 그들의 필적을 바라보겠고, 시 쓸 일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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