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강인한 시 모음

김욱진 2020. 9. 25. 11:11

불은 내게 묻는다/강인한

 

 

문밖에 바람이 불고
부드러운 어둠이 이방의 도시를 지나온다.
어디선가 진정한 기도소리가 들린다.
순금의 회상이 시작된다.


소리 없는 폭우 속으로 들이 달리고
촛불 속에 깜박이는 동양의 산문,
내가 읽다 만 문장이
문득 장미의 불에 날개를 적신다.


마음속에 잠들지 못하는
그대 자정의 뒤척임도 사라져 갔다.
내 마음속에서는 이제 아무것도
울지 못한다, 내 마음속에서는.


풀밭에 떨어지는 희미한 별빛
벌레 울음소리마저 깊숙이 파묻히고
한 마디 대지의 흐름을 빌어


불은 내게 묻는다.
안에서 내다보는 캄캄한 혼란과
밖에서 들여다보는 눈부신 질서를.


마음과 마음 사이에 서성거리는
시간의 어두운 그림자,
내 몸 안에 전 생애의 그늘을 던지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림자가 흔들린다.

 

 

물속에서 눈 뜨기/강인한

 

 

내 나이 여섯 살이며, 이리세무서장 관사에서의 일입니다.

작은 연못 가슴에 품은 정원이 있고

정원에서 대문 쪽으로는 시멘트 담벼락이 이웃집

계집애의 보조개와 한길의 경사를 비스듬히 부축하고 있었지요.

흙을 갈아엎은 밭이 한길까지 얼씨구절씨구 흥에 겨워서

관사 내부와 밖의 소문, 봄과 꿈의 경계에 선

측백나무를 참새 소리들이 지지고 볶고 꼬드기고 있었습니다.

어쩌다 비좁은 가지와 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간절한 세상 풍경이

거리의 소란과 어우러져

우리 집으로 들어오려고 안달복달할 적이면

가만히 발걸음을 숨긴 채 나는 측백나무 울타리 쪽에

이따금 눈길을 묻곤 하였는데요.

어느 날은 흰옷 입은 사내가 나타나 쪼그리고 엎드린 내 눈앞에

막무가내로 들이대며 바지춤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낯선 사내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가 바지를 까고 힘차게 내쏘는 물줄기를 조마조마 지켜보는데

내 생전 그렇게 커다랗고 거무칙칙한 물건을

본 적 없어 무척 놀랐습니다.

눈을 뜬 채 한순간 숨을 쉴 수도 없었습니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그 사내의 검고 길쭉한 것처럼 생긴 방망이들을

높은 하늘에서 몇 개씩이나 떨어뜨리고 가는 비행기를

하루에도 두세 번씩 보았습니다.

이후로 우리 식구들은 손마다 보따리를 들고서

측백나무 울타리에 내 가오리연도 걸려있는 관사를 떠났습니다.

그건 단기 사천이백팔십삼년 여름의 시작이었지요.

물에 잘 녹는 슬픔은 그렇게 시작되었지요.

 

 

 

파리를 방문한 람세스 2세/강인한

 

 

삼천 년도 훨씬 지나

이제야 나는 바코드라는 지문을 가진다.

 

모래와 바람과 강물처럼 흘러간 시간이었다.

넌출지는 시간의 부침 속에

스쳐 가는 존재들,

 

철없는 것들,

공포의 아버지가 무섭고 두려웠으리.

아랍 놈들이 코를 뭉개고, 영국 놈들이

수염과 턱을 깨부수고 마침내

스핑크스는 눈도 빠지고 혀도 잃어버렸다.

 

시간의 돛배를 타고 이승, 저승을 오가는 검은 태양.

 

한 나라의 역사란

파피루스의 희미한 글자들

바스러지는 좀벌레들에 지나지 않으리,

날마다 피를 정화하는 히비스커스 꽃차를 마셔도

추악한 것을 어찌 다 씻어서 맑히랴.

 

콩코르드 광장에 우뚝 선 오벨리스크,

저것은 일찍이

테베의 신전 오른편에 세운 것이었다.

 

트랩이 내려지고 갑자기 울려 퍼지는 팡파르,

공항이다.

엄정한 의장대의 사열을 받으며

나는 아부심벨에 두고 온 사랑을 생각한다.

불타버린 심장으로 느낀다.

 

전쟁에 이겨야만 남의 나라를 정복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저 오벨리스크가 침묵으로 말한다.

 

이곳에서 나는 이집트의 파라오,

까마득한 이방의 시간과 대지 위에 서 있다.

 

 

 

 

왼손에 대한 데생/강인한


 

초승달이 떠있다.

달은 내가 끄는 카트 속에서 출렁거린다.

누구는 스푼으로 커피를 저으며 인생을,

 

나는 월요일 밤 쓰레기를 분류하며 세월을 느낀다.

 

해묵은 개인적 감정을 버린다.

중학교 1학년 미술시간에 연필로 그린 내 왼손을

버린다. 오래 망설이다가

가라, 돌아오지 마라.

더러운 애착처럼 멀리 내던진다.

 

오래된 스크랩과

대학 시절 습작노트,

백과사전보다 두터운 총동창회 명부,

유치한 일기장, 눈 시린 추억들은

손잡이 헐거운 부재의 서랍으로 옮긴다.

 

초승달을 버리고 다음 주엔

보름으로 가는 달을 박스째 출렁출렁

기억의 서랍에서 망각의 서랍으로 옮겨야 한다.

 

한때는 기쁨으로 빛나던 나를

망각의 강에 내다버린 젊은 연인이여,

놀라지 마라.

두근대는 당신 가슴을 점자처럼 더듬는 건

스케치북을 찢고 뛰쳐나온 내 소년의 손이다.

 

 

 

그림에서 빠져나온 마하 / 강인한

 


고소한 옥수수 또르띠야가 생각나요.

맛있는 하몽을 싼 또르띠야에 적포도주도 한 잔.

배경을 떨치고 살금살금 액자 틀을 뛰어내려 사뿐,

마요르 광장에 나갈 테니 눈감아주셔요.

비어 있는 액자 앞에서 구시렁거리는 사람들이야

나체의 체온 희미한 장의자에

페르시아 고양이처럼 드러누워 쉬든지 말든지.

나도 그림 밖의 세상에서

다디단 공기를 숨 쉬고 맨발로 달리고 싶어요.

랄랄라 캐스터네츠 튕기며 멋진 춤을 추고 싶어요,

올레! 멀리 있는 별빛 그리운 말라게니아.

내 얼굴에 환희의 금실 은실 햇살을 받고 싶어서

방금 프라도 미술관을 빠져나온 길이에요.

프릴이 많이 달린 플라멩코 무용복인데 실은 좀 더러운가요.

미술관 회랑에서 빠져나온 걸 아무도 몰라요.

날마다 테레빈유 마시며 가슴이 먹먹했어요.

날마다 180853, 검은 밤이 끝없이 되풀이되고

날마다 총소리, 총소리, 그리고 높이 팔 벌린 검은 비명소리

강물처럼 침대 밑으로 흐르고

제 자식을 잡아먹는 크로노스 피 묻은 아가리,

끔찍한 시간의 검은 괴물이 쫓아오고 있어요.

동트는 핏빛

, 이제는 돌아가야 해요.

돌아가서 당신을 기다릴게요. 목 뒤로 손깍지 끼고

어둠 속에 빛나는 가슴 열어 한 송이 백합처럼

기다릴게요. 어서 오셔요.

두려움 없이 보셔요, 온몸으로 기다리는 내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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