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도둑
김욱진
올 정초 인터넷 사이트 떠돌다
우연히 오탁번 시인의 '잠지'에 눈이 꽂혀
해탈한 동승처럼 깔깔대고 웃다가
짜릿한 기분 만끽하다가… 정겹기도 하다가 시원하다가
육십 평생 쉬~한 거 요로코롬 짤막하게 내뱉은 말
한꺼번에 다 주워 담다가
따끈따끈 느껴져 오는 오줌발
아, 나도 이런 쉬 한 편 남겨야겠다고
주문을 외듯 '잠지'라는 시를 연신 중얼거렸다
그러고 한 달포쯤 지날 무렵, 까맣게 잊은
오 시인의 '呪文'이라는 시를 용케도 맞닥뜨렸다
내 주문은 무심결에 呪文으로 다시 불붙었다
오만 신 다 불러 술술 풀어놓은 呪文이 어찌도 그리
내 주문과 딱 맞아떨어지던지
주인 몰래 퍼다 내 블로그 참한시 방에
경처럼 걸어놓고 시도 때도 없이 읽었다
글 도둑맞은 오 시인, 그날 밤
내 블로그 감쪽같이 다녀갔다
도적질도 한두 번 하고 나니
고까짓 글 한 편 훔치는 거 쯤야 뭐, 시답잖게 여겼던 고것도
섣달 그믐밤 잘깍거리는 초침 베고 누워 있으니
오! 시인께 죄스런 맘 새록새록 들어
작년 늦가을 어렵사리 출간한 시집이라도 한 권 보내드려야겠다 싶어
부랴부랴, 인터넷망 속 비집고 들어가 시인 주소 샅샅이 찾아보는데
충북 제천시 백운면 애련리 198, 원서문학관이라고만 나와 있다
그곳에 한참 머뭇거리다 나는 고마
'시집보내다'와 '밥냄새'에 흠뻑 젖어
새해 오기 1분 전 시 두 편을 몽땅 또 훔치고 말았다
글 도둑질한 나를 끈질기게 추적하는 오 시인
무술년 첫날 내 블로그 다녀간 첫 번째 밤손님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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