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시국

글 도둑

김욱진 2020. 11. 8. 20:18

글 도둑

김욱진

 

올 정초 인터넷 사이트 떠돌다

우연히 오탁번 시인의 '잠지'에 눈이 꽂혀

해탈한 동승처럼 깔깔대고 웃다가

짜릿한 기분 만끽하다가… 정겹기도 하다가 시원하다가

육십 평생 쉬~한 거 요로코롬 짤막하게 내뱉은 말

한꺼번에 다 주워 담다가

따끈따끈 느껴져 오는 오줌발

아, 나도 이런 쉬 한 편 남겨야겠다고

주문을 외듯 '잠지'라는 시를 연신 중얼거렸다

 

그러고 한 달포쯤 지날 무렵, 까맣게 잊은

오 시인의 '呪文'이라는 시를 용케도 맞닥뜨렸다

내 주문은 무심결에 呪文으로 다시 불붙었다

오만 신 다 불러 술술 풀어놓은 呪文이 어찌도 그리

내 주문과 딱 맞아떨어지던지

주인 몰래 퍼다 내 블로그 참한시 방에

경처럼 걸어놓고 시도 때도 없이 읽었다

글 도둑맞은 오 시인, 그날 밤

내 블로그 감쪽같이 다녀갔다

 

도적질도 한두 번 하고 나니

고까짓 글 한 편 훔치는 거 쯤야 뭐, 시답잖게 여겼던 고것도

섣달 그믐밤 잘깍거리는 초침 베고 누워 있으니

오! 시인께 죄스런 맘 새록새록 들어

작년 늦가을 어렵사리 출간한 시집이라도 한 권 보내드려야겠다 싶어

부랴부랴, 인터넷망 속 비집고 들어가 시인 주소 샅샅이 찾아보는데

충북 제천시 백운면 애련리 198, 원서문학관이라고만 나와 있다

그곳에 한참 머뭇거리다 나는 고마

'시집보내다'와 '밥냄새'에 흠뻑 젖어

새해 오기 1분 전 시 두 편을 몽땅 또 훔치고 말았다

글 도둑질한 나를 끈질기게 추적하는 오 시인

무술년 첫날 내 블로그 다녀간 첫 번째 밤손님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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