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사지처럼 산다 외 14편
정호승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처럼 산다
요즘 뭐 하고 지내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에 쓰러진 탑을 일으켜세우며 산다
나 아직 진리의 탑 하나 세운 적 없지만
죽은 친구의 마음 사리 하나 넣어둘
부도탑 한번 세운 적 없지만
폐사지에 처박혀 나뒹구는 옥개석 한 조각
부둥켜안고 산다
가끔 웃으면서 라면도 끓여먹고
바람과 풀도 뜯어먹고
부서진 석등에 불이나 켜며 산다
부디 어떻게 사느냐고 다정하게 묻지 마라
너를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고
거짓말도 자꾸 진지하게 하면
진지한 거짓말이 되는 일이 너무 부끄러워
입도 버리고 혀도 파묻고
폐사지처럼 산다
봄비
어느날
썩은 내 가슴을
조금 파보았다
흙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 흙에
꽃씨를 심었다
어느날
꽃씨를 심은 내 가슴이
너무 궁금해서
조금 파보려고 하다가
봄비가 와서
그만두었다
모유
어미 잃은
배고픈 갓난강아지 몇마리
이웃집 늙은 암캐의 품에 안겨주자
이튿날
암캐의 젖망울이 모두 서고
하얀 젖이 흘러나왔다
강아지들은 하루종일
그 젖을 빨아먹고
꼬물꼬물
웃으면서 기어다녔다
거울
거울을 보다가 가끔
내 얼굴이 악마의 얼굴이 아닌가
한참 들여다볼 때가 있다
거울이 가끔 내 얼굴을
와장창
깨뜨려버릴 때가 있다
어느 벽보판 앞에서
어느 벽보판 앞
현상수배범 전단지 사진 속에
내 얼굴이 있었다
안경을 끼고 입꼬리가 축 처진 게
영락없이 내 얼굴이었다
내가 무슨 대죄를 지어
나도 모르게 수배되고 있는지 몰라
벽보판 앞을 평생을 서성이다가
마침내 알았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죄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늙어버린 죄
꽃
사람은 꽃을 꺾어도
꽃은 사람을 꺾지 않는다
사람은 꽃을 버려도
꽃은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영정 속으로 사람이 기어들어가
울고 있어도
꽃은 손수건을 꺼내
밤새도록
장례식장 영정의 눈물을 닦아준다
늪
지금부터
절망의 늪에 빠졌다고 말하지 않겠다
남은 시간이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희망의 늪에 빠졌다고 말하겠다
절망에는 늪이 없다
늪에는 절망이 없다
만일 절망에 늪이 있다면
희망에도 늪이 있다
희망의 늪에는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가득 빠져 있다
광화문에서
서울 광화문에
소를 몰고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소가 경복궁 근정전 앞마당을
가래질한다면
나는 그 뒤를 신발 벗고 따라가
그 사람의 소가 될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송아지도 낳을 것이다
송아지의 잔등을 씻고 지나가는
봄비도 될 것이다
서울 광화문에 워낭소리 울리며
느릿느릿 황소 한 마리 몰고 가는
그런 사람 있다면
시집
어느날
무심히 책상에 앉아 졸고 있다가
문득 시집이 꽃혀 있는 책꽂이를 바라보았다
임영조 시집 『시인의 모자』
박정만 시집 『잠자는 돌』
정채봉 시집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김남주 시집 『나의 칼 나의 피』
천상병 시집 『귀천』
조태일 시집 『자유가 시인더러』
신현정 시집 『바보사막』
뜻밖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떠난 시인들의 시집이
마치 묘비명처럼
나란히 서로 추운 듯 몸을 바짝 기대고 꽂혀 있었다
생전에 내가 만나보았던
함께 차를 마시고 밥을 먹었던 시인들의 시집이
물끄러미
졸고 있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슬그머니 그 옆에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내 시집을 갖다 꽂고
다시 눈을 감았다
물의 꽃
강물 위에 퍼붓는 소나기가
물의 꽃이라면
절벽으로 떨어지는 폭포가
물의 꽃잎이라면
엄마처럼 섬기슭을 쓰다듬는
하얀 파도의 물줄기가
물의 백합이라면
저 잔잔한 호수의 물결이
물의 장미라면
저 거리의 분수가 물의 벚꽃이라면
그래도 낙화할 때를 아는
모든 인간의 눈물이
물의 꽃이라면
충분한 불행
나는 이미 충분히 불행하다
불행이라도 충분하므로
혹한의 겨울이 찾아오는 동안
많은 것을 잃었지만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다
죽음이란 보고 싶을 때 보지 못하는 것
보지 못하지만 살아갈수록 함께 살아가는 것
더러운 물에 깨끗한 물을 붓지 못하고
깨끗한 물에 더러운 물을 부으며 살아왔지만
나의 눈물은 뜨거운 바퀴가 되어
차가운 겨울 거리를 굴러다닌다
남의 불행에서 위로를 받았던 나의 불행이
이제 남의 불행에게 위로가 되는 시간
밤늦게 시간이 가득 든 검은 가방을 들고
종착역에 내려도
아무데도 전화할 데가 없다
짐
내 짐 속에는 다른 사람의 짐이 절반이다
다른 사람의 짐을 지고 가지 않으면
결코 내 짐마저 지고 갈 수 없다
길을 떠날 때마다
다른 사람의 짐은 멀리 던져버려도
어느새 다른 사람의 짐이
내가 짊어지고 가는 짐의 절반 이상이다
풀잎이 이슬을 무거워하지 않는 것처럼
나도 내 짐이 아침이슬이길 간절히 바랐으나
이슬에도 햇살의 무게가 절반 이상이다
이제 짐을 내려놓고 별을 바라본다
지금까지 버리지 않고 지고 온 짐덩이 속에
내 짐이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비틀거리며 기어이 짊어지고 온
다른 사람의 짐만 남아 있다
새똥
천사의 가슴에도
똥이 들어 있다
하하하
새똥이 들어 있다
뒷모습
그동안 나는
내 뒷모습이 아름다워지기를 바라는 사치를 부려왔다
내 뒷모습에 가끔 함박눈이 내리고
세한도의 소나무가 서 있고
그 소나무에 흰 눈꽃이 피기를 기다려왔으나
내 뒷모습에도 그믐달 같은 슬픈 얼굴이 있었다
오늘은 내 뒷모습에 달린 얼굴을 향해 개가 짖는다
아이들이 달려와 돌을 던진다
뒷모습의 그림자끼리 비틀비틀 걸어가는 어두운 골목
보행등의 흐린 불빛조차 꺼져버린다
내일은 내 남루한 뒷모습에 강물이 흘러라
내 뒷모습의 얼굴은 둥둥 강물에 떠내려가
배고픈 백로한테 쪼아먹혀라
명동성당
바보가 성자가 되는 곳
성자가 바보가 되는 곳
돌멩이도 촛불이 되는 곳
촛불이 다시 빵이 되는 곳
홀연히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곳
돌아왔다가 고요히 다시 떠날 수 있는 곳
죽은 꽃의 시체가 열매 맺는 곳
죽은 꽃의 향기가 가장 멀리 향기로운 곳
서울은 휴지와 같고
이 시대에 이미 계절은 없어
나 죽기 전에 먼저 죽었으나
하얀 눈길을 낙타 타고 오는 사나이
명동성당이 된 그 사나이를 따라
나 살기 전에 먼저 살았으나
어머니를 잃은 어머니가 찾아오는 곳
아버지를 잃은 아버지가 찾아와 무릎 꿇는 곳
종을 잃은 종소리가 영원히
울려퍼지는 곳
- 시집 『밥값』(창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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