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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상시문학상] 존 테일러의 구멍 난 자루 외 4편/ 송찬호

김욱진 2011. 1. 2. 08:02

[제3회 이상시문학상 수상작]

 

 

존 테일러의 구멍 난 자루 외 4편

 

 

                  송찬호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이,

그 자루의 옆구리에 난 총알구멍으로

존 테일러의 부유한 피와 살이

모두 빠져나가는 데 걸린 시간은

채 다섯 달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존 테일러의 마지막 시간이

꼭 쓸쓸했던 것만은 아니다

'천국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라는 호스피스 모임에서 나온

부패가 따뜻하게 그의 영면을 도왔고

또 코를 감싸 쥘 만큼의 악취가 그 옆을 지켰다

 

그러고 보면, 주위에서 그와 같은

납치나 실종 사건이 드문 일만을 아니다

존 테일러는 옆구리를 움켜쥔 채

갇힌 자루 속에 웅크리고 누워

그의 허벅지에, 그리고 푸른 자루의 허벅지에

피를 찍어 이렇게 썼다

국가는 개새끼, 왜 나를 도우러 오지 않는 것인가

 

존테일러는 다섯 달 만에 어두운

농가 수로에서 뼈만 남긴 채 발견되었다

자루는 아주 가벼웠다

그런데, 그가 입고 있던 양복 안쪽에

새겨진 존 테일러라는 이름은

그의 이름인가 양복상표 이름인가

이 모든 것은 썩지 아니한가

 

 

 

개똥지빠귀

 

 

어디선가 그 오래된 나무에게

킬러를 보냈다 한다

한때 꽁지머리였던

숲 해설가였던

달의 비서이기도 했던

지금은 냉혹한 킬러로 변신한 그를

 

안에 아무도 없는지 그 나무속에서

찌릿찌릿찌릿, 새소리같이

오랫동안 전화가 울린다

오후 다섯 시,

노을이 생기느라

하늘이 붉게 조금 찢어졌을 뿐인데

벌써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나는 다만 조그만 쇠뭉치 같은 것이

나무에서 솟구쳐 올라

빠르게 내 옆을 지나가는 것을 언뜻 보았을 뿐이다

그때, 얼굴에 칼자국 흉터가 있는

작고 단단한 그것이

개똥지빠귀 뺨이었을까?

 

날이 빠르게 저물어간다

사건은 명료하다

누군가는 절명으로 산다는 것

오래된 나무 같은 걸 쓰러뜨려

노래를 얻기도 한다는 것,

작고 단단한 그 무엇이

빠르게 내 옆을 스쳐 지나가던 저녁 무렵.

 

 

 

이상한 숲 속 농원

 

 

구병산 '이상한 숲 속 농원'에는

오래된 새소리 자판기가 있다

백 원짜리 동전 세 개만 있으면

쪼르릉쪼르릉, 시원한

방울새 소리 한잔 내려 마실 수 있다

 

이상한 숲 속 농원에는 버섯이 많다

밤이면 아직도 20세기

버섯의 유령들이

이상한 숲 속을 배회하곤 한다

 

이상한 숲 속 농원 근처에는 부리가 긴

새들이 사는 호리병 숲도 있다

나는 아직 그렇게 목숨이 길지 않아

그 숲 속까지 들어가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상한 숲 속 농원에는 날마다

헐레벌떡 사슴이 뛰어와

숨을 곳을 찾곤 한다

뒤이어 사냥꾼이 달려와 사슴을 물으면

사람들은 짐짓 모른 채 먼 산을 바라보기도 한다

 

나는 이상한 숲 속 농원 그 여러 계契 모임 중에서

가을날 속눈썹처럼 하얗게 웃는 메밀꽃계가 좋다

가는귀먹은 노루구름이 부비고 놀다 가서 좋다

나는 나날이 장님이 되는 중이어서 더 좋다

 

 

 

붉은 돼지들

 

 

돼지 운반 차량이 전복되고

간신히 살아남은 붉은 돼지들이

가까운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지친 네다리로 땅만 보고 걷는

그들의 걸음걸이는 한결같았다

그들은 그들의 무리를 표시하는

어떤 나뭇가지도 입에 물지 않고 있었다

 

언덕에는 지난 여름 지독한 피부병을 앓은

버짐나무들이 몇 그루 서 있었고

약수터로 올라가는 구불구불한 길은

오래전 이 길을 지나간

어떤 종교의 이동경로와 흡사했다

그러기에 그들의 다치고 지친 몸을 쉬기에

언덕은 지나치게 통속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붉은 돼지들이었다

환란이 오면 그들은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후각으로 땅을 헤쳐

붉은 돼지씨를 심는 것이었다

 

그들은 지난 다섯 달 동안 쉼 없이 살을 찌웠고

만족한 만한 무게로 계체량을 통과했다

돼지 운반차량은 그들을 싣고

새벽별 돋는 초승달 도축장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언덕을 오르며 돌부리를 디딜 때마다

두 갈래로 갈라진 그들의 발굽에서

오래 걸은 자들의 나막신 소리가 났다

 

환란이 올 때마다

붉은 돼지들에게 전해지는 말,

흙으로 가라

언덕으로 가라

 

 

 

서푼짜리 해적질

 

 

내 친구는 아무도모를灣 해적,

칠년만에 간신히 해적 면허를 따서

지금은 바다에 나가 살지

 

친구는 그가 사용하던 때묻은

소파와 침대를 바다에 데리고 갔지

바다생활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그냥 바다에 주저앉거나 함부로

쓰러져 눕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이었지

 

한번은 거대한 빙하를 이끌고 가는

흑등고래 선단을 만났다 했지

그러나 그들을 공격하지 않은 건

그런 크고 차가운 이성은

생활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더라는 것

 

드디어 어느 돈 많은 물고기를 공격하여 잡게 됐지

그 물고기 철철 울며 말하길, 살려만 주면

이 지상에 군림하는 쥐의 대왕을 시켜

푸른 구슬을 준다 했지

 

친구는 2급 해적 면허에 年俸 이천의 바다 생활자,

저녁이면 고요히 해적 깃발을 내리고

취미로 따개비 우표를 사 모으거나

먼 바다 학원에 나가 심해의 다족류 회화를 배우기도 한다지

 

그런데, 친구는 한번이라도 그 푸른

구슬을 쥐어 보았을까

친구는 이가 아파 이번 주말엔 무인도 치과에 예약을 한다지

아직도 그 낡은 사상인 침대와 소파를 버리지 않고 있지

지금도 아무도모를灣 바다에 살고 있지

 

 

- 『시와세계』2010.겨울호

출처 : 함께하는 시인들 The Poet`s Garden
글쓴이 : 박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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