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작

살과 설 사이

김욱진 2026. 3. 16. 20:33

살과 설 사이 

김욱진

 

 

까치설날 아침, 골목을 도니
사람들 굴비처럼 수십 미터 엮여있다

홍게 열 마리 삼만 원
고향 대신 붉은 등판 흘긋거리며
대게 대신 홍게를 집어 든다

대목엔 늘 바가지라지만
설인데, 설마
설마가 슬쩍 줄 속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비닐장갑 낀 손들
게 다리를 들춰보고 배를 눌러보고
살아있는 값을 깎는다

"설 대목인데, 이 정도면 그저 아이껴"
껴껴, 게 장수 입에서 튀어나온 아이
목소리가 구불텅구불텅 골목을 후벼 판다

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길목
폐지 가득 실은 리어카 하나
설을 비켜 천천히 지나간다

꼬부랑 할머니
이 게 저 게 눈으로 헤아리다
찌는 냄새만 깊숙이 들이마신다

누군가는 살을,
누군가는 설을 고른다

살과 설 사이
어정거리는 허기
먼저 낚아채 가는 쪽이 있다

비닐봉지 속 홍게는 묵직하고
리어카 바퀴는 가볍게 덜컹인다

올 설은
상 위에서 붉게 오르고
길목에서는 김처럼 흩어진다

 

(2026 시인부락 봄호)

'♧...발표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해사 들머리에 들다  (0) 2025.10.20
보해등 환한 암자  (0) 2025.10.20
반곡지盤谷池  (0) 2025.10.20
수상한 시집  (0) 2025.10.20
김욱진 시인 2020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발간지원 선정작 14편  (0) 2025.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