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어느 날 우연히
이성복
어느 날 갑자기 망치는 못을 박지 못하고 어느 날 갑자기 벼는 잠들지
못한다 어느 날 갑자기 재벌의 아들과 고관의 딸이 결혼하고 내 아버지는
예고 없이 해고된다 어느 날 갑자기 새는 갓낳은 제 새끼를 쪼아먹고
카바레에서 춤추던 유부녀들 얼굴 가린 채 줄줄이 끌려나오고 어느 날
갑자기 내 친구들은 고시에 합격하거나 문단에 데뷔하거나 미국으로
발령을 받는다 어느 날 갑자기 벽돌을 나르던 조랑말이 왼쪽 뒷다리를
삐고 과로한 운전수는 달리는 버스 핸들 앞에서 졸도한다
어느 날 갑자기 미류나무는 뿌리째 뽑히고 선생은 생선이 되고 아이들은
발랑 까지고 어떤 노래는 금지되고 어떤 사람은 수상해지고 고양이 새끼는
이빨을 드러낸다 어느 날 갑자기 꽃잎은 발톱으로 변하고 처녀는 양로원으로
가고 엽기 살인범은 불심 검문에서 체포되고 어느 날 갑자기 괘종시계는
멎고 내 아버지는 오른팔을 못 쓰고 수도꼭지는 헛돈다
어느 날 갑자기 여드름 투성이 소년은 풀먹인 군복을 입고 돌아오고
조울증의 사내는 종적을 감추고 어느 날 갑자기 일흔이 넘은 노파의 배에서
돌덩이 같은 태아가 꺼내지고 죽은 줄만 알았던 삼촌이 사할린에서 편지를
보내온다 어느 날 갑자기, 갑자기 옆집 아이가 트럭에 깔리고 축대와 뚝에
금이 가고 월급이 오르고 바짓단이 튿어지고 연꽃이 피고 갑자기,
한약방 주인은 국회의원이 된다 어느 날 갑자기, 갑자기 장님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걷고 갑자기, x이 서지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주민증을 잃고 주소와 생년월일을 까먹고 갑자기,
왜 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고
그러나 어느 날 우연히 풀섶 아래 돌쩌귀를 들치면 얼마나 많은 불개미들이
꼬물거리며 죽은 지렁이를 갉아먹고 얼마나 많은 하얀 개미 알들이 꿈꾸며
흙 한점 묻지 않고 가지런히 놓여 있는지
'♧...참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다리를 먹으며/김광규 (0) | 2011.09.03 |
---|---|
술래잡기/김종삼 (0) | 2011.09.01 |
통도사 경봉 큰스님 법문 (0) | 2011.08.28 |
아버지의 나이/정호승 (0) | 2011.08.25 |
석가모니 부처님 오도송 (0) | 2011.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