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눈
개고랑 물이 풀린다.
여기저기 강아지풀들의 목뼈가
부러져 있다
조금 밝아지는 그늘인 듯
조금 밝아지는 그늘의 설토와 꽃 비탈인 듯
눈발은 삐딱하게 쓸리면서
가지 마, 가지 마,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고
다리 오그린 채 들쥐들이
푸른 눈을 뜨고 있다
깜냥
바람이 자고 잇네요. 그 곁에
낮달도 자고 있네요
남쪽 바닷가 소읍을
귀 작은 나귀가 가고 있네요
패랭이꽃이 피어 있에요
머나먼 하늘, 도요새 우는
명아주 여뀌꽃도 피어 있네요
천재동씨의 탈
비쭈기나무 키 너머 영도 앞 바다
오륙도 저쪽에 뜬 달아,
여름 밤 둥근 달아,
우리 이모 보았지러.
곰보 곰보 살짝곰보
우리 이모 마실 갈 때 보았지러
만월
강물은 어디쯤 가고 있는가
숨이 차서 이제는 울지 않는 새
울다가 멎어 버린 입을 벌리고
눈감으면
발가락 사이 모래톱은 하염없이
무너지고 있다. 퍼석퍼석 소리내며
무너지고 있다.
나이지리아
나이지리아 나이지리아.
바람이 불면 승냥이가 울고
바다가 거멓게 살아서
어머님 곁으로 가고 있었다.
승냥이가 울면 바람이 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빛나던 이빨,
이빨은 부러지고 승냥이도 죽고
지금 또 듣는 바람 소리
나이지리아 나이지리아.
바다 사냥
너무 낮게 뜬 놀이
자꾸 발바닥에 깔린다.
놀을 밟고 가는 듯한 경인가도
키 큰 양버들
소사 가까운 중국반점에서
옛 동창들을 만난다.
캡을 쓴 형사가 둘이
저만치 도보로 가고 있고,
그들을 보내면서
그새 짙은 귤빛이 된
바다.
바라보면 옛 동창은
한 마리 가을너새가 되어
울고 있고.
호도
안다르샤, 도덕이
아마로 짠 식탁포처럼
마르셀이라는 농부의
콧등이 펑퍼짐한 호피 구두처럼
닳고 닳을수록 윤이 난다
바스크족 늙은 추장의
처가가 있는 마을,
이승에서는 제일 높은
하늘이 있어 낮에도
은방울꽃 빛 달이 뜨고
다람쥐가 죽으면 눈이 내리는
안다르샤.
순댓국
남쪽
눈 내리는 날에
숱 짙은 눈썹 한 쌍.
숙주나물 시금치
해 저무는 까치 소리 들린다
노새를 타고
기러기는 울지 마.
기러기는 날면서 끼루룩 끼루룩 울지 마.
바람은 죽어서 마을을 하나 넘고 둘 넘어
가지 마. 멀리 멀리 가지마.
왜 이미 옛날에 그런 말을 했을까
도요새는 울지 마.
달맞이꽃은 여름밤에만 피지 마.
언뜻언뜻 살아나는 풀무의 불꽃.
풀무의 파란 불꽃
버찌
밤은
작디작은 입술이라고 하고
밤은 또
눈먼 코뿔소라고도 하지만
어깨를 타고 밤은 무너지는 시늉만 한다
밤은 차라리 강물이고 숲이라
안은 보이지 않고
봄이 오면 산과 들에
한없이 이어지고 또 이어져 있다
안료
해가 지고 있다.
하늘 가까이 작은 열매 몇 개가
빛나고 있다
여황산 긴 허리를 빠져나온
바다.
턱이 뽀족한 아이가
발을 담그고 있다
집에는 가지 않는 그 아이를 위하여
달이 뜨고 어둠이 오고 있다.
서천을
하나님은 언제나 꼭두새벽에
나를 부르신다
달은 서천을 가고 있고
많은 별들이 아직도
어둠의 가슴을 우비고 있다
저쪽에서 하나님은 또 한번
나를 부르신다.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 가까이
가끔 천리항이
홀로 눈뜨고 있는 것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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