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 마을에서
김춘수
노새는 죽어서 어디로 갔나.
하늘은 너무 밝고 너무 가까이에 있다
토끼풀도 물또래도
노고지리도
저녁에는 별들도 너무 가까이에 있다
허파와 간에 작은 방울을 달고
노새는 죽어서 어디로 갔나.
땅 위에
구름 위 땅 위에
하나님의 말씀
이제는 피도 낯설고 모래가 되어
한줌 한줌 무너지고 있다.
밖에는 봄비가 내리고
남천이 젖고 있다.
남천은 멀지 않아 하얀 꽃을 달고
하나님의 말씀 머나먼 말씀
살을 우비리라.
다시 또 우비리라
둘째번 마리아
유카리나무 그늘에
가도 가도 갈릴리 호숫가
유카리나무 그늘에
발톱 다 빠지고
신발 벗고
눈 한번 곱게 감고
거기가 하늘인 듯
하늘 한쪽에
흐린 날은 무너지는 하늘 한쪽에
유카리나무 그늘에
마리아, 막달라의 마리아.
너는 아직 잠을 깨지 않고 있나니.
서쪽 포도밭 길을
한국 민화에 나오는
주둥이가 길고 빨간 한 떼의 오리 떼가 가고 있다. 그들 뒤를
귀가 작은 한국의 나귀도 한 마리 가고 있다.
뜻밖이다.
유카리나무는 잎이 반쯤 지고
하늘빛 열매를 달고 있다.
새처럼 가는 다리를 절며 예수가
서쪽 포도밭 길을 가고 있다.
그 뒤를 베드로가 가고 있다.
해가 지기 전에.
나자로여!
발렌티노는
루돌프 발렌티노라고 합니다
피사 시청 광장을
나귀가 한 마리 가고 있읍니다
베타니아까지는 아직도 먼 길입니다
망개알이 가맣게 타고 있읍니다
아침에 여자들의 눈은
비가 됩니다. 마리아.
비가 됩니다.
루돌프와 당신 오빠는 왜
죽을 수도 없었나요?
분꽃을 보며
목수의 아내 마리아
당신이 든 잔은
눈물도 아니고 놋쇠도 아니다
당신은 양 한 마리와
하늘에 있다
아들을 위하여
언제까지나 처녀로 있어야 하는 마리아.
당신 아들은 지금도
갈릴리호수를 맨발로 가고 있다.
당초문
-혹은 솔제니친
진실이 풀밭에 가 눕는다.
가을이 시작되려는 어느날.
아무도 보지 못한다
커다란 구둣발이 하나
눈앞을 스쳤을 뿐이다.
겨레의 무릎은 따뜻했고
지금은 강아지풀이 마르고 있다.
진실은 밟히고 싶고 마지막 천둥과 함께
울고 싶을 뿐이다.
넓고 넓은 가을 하늘.
활자 사이로 끼어들어
겨울이 와도 죽을 수가 없다.
죽을 수가 없다.
겨울 꽃
잎을 따고 가지를 친다
하늘이 넓어진다.
살을 버리고 뼈를 깍는다
뼈를 깍아서 뼈를 드러낸다
바다를 다 적신 피 한 방울.
그것은 언제나 가고 있다.
넓어진 하늘로
드러난 뻣속의 드러난 뼛속으로
그것은 언제나 가고 있다.
어릿광대
-루오 씨에게
내가 웃을 때 여러분은 조심해야 해요. 내가 비칠할 때 여러분은
날 붙잡아야 해요. 비칠 하는 건 언제나 여러분이니까요. 내가 하늘을
난다면 날 놓아 줘야 해요. 비칠 비칠 하는 건 언제나 여러분이니까요.
난 구름이고 새니까요. 곪아 가는 건 언제나 여러분의 치근이고 또 하나의
치근이니까요. 치근이니까요.
나는 지금 우스워요우스워요우스워요. 너무 우스워서 한 가지도 우습지가
않아요.
차례
추석입니다
할머니
홍시 하나 드리고 싶어요
상강의 날은 아직도 멀었지만
안행의 날은 아직도 멀었지만
살아 생전에 따뜻했던 무릎.
크고 잘 익은
홍시 하나 드리고 싶어요
용둣골 수박.
수박을 드리고 싶어요.
수박 살에
소금을 조금 발라 드렸으면 해요
그러나 그 뜨거웠던 여름은 가고
할머니.
어젯밤에는 달이
앞이마에 서늘하고 훤한
가르마를 내고 있었어요.
오십년 전 그 날처럼.
나귀도 없이
초라니.
남도 사투리로는
초랭이.
방정초랭이라고 한다.
유카리나무는 키가 얼마나 클까 하고
유카리나무에는 어떤 꽃이 필까 하고
예루살렘까지 밀밭길을 가고 있다.
나귀도 없이 별만 보며.
살을 감추는
나는 죽고 오늘 밤
살을 감추는 별 혹은 석류꽃 그늘에
눈뜨는 그대.
나는 이미 죽었나니 눈뜨는
그대의 눈물. 깨지 않는 내 밤을
젖게 하여라.
비이어르 아스피린
목로에 턱을 괴고 소주를 기울인다
낙지회를 조금.
화류나무 휘휘 늘어진 가지가
비를 맞는다
바이어르 씨는
유기합성화학의 제 1인자다
그가 발명한 인디고는 식물염료.
생각하면 머리가 어질어질
신열이 난다
화류나무 휘휘 늘어진 가지가
비를 맞는다.
바이어르 씨의 바이러르 제약회사도 비를 맞는다
죽은 낙지도 살아 있는 역사도
비를 맞는다
바이어르 씨의 인디고는 식물염료.
살에 스미고 뼈에 스민다.
고뿔
-고,장 폴 샤르트르에게
하늘수박 가을 바람 고추 잠자리.
돌담에 속색이던 경상도 화개 사투리
신열이 나고 오늘 밤은 별 하나가
연둣빛 화석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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