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눈, 바다, 산다화/김춘수

김욱진 2013. 12. 29. 13:36

        눈, 바다, 산다화

         김춘수

 

1

 

바다가 왼종일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이따금

바람은 한려수도에서 불어오고

느릅나무 어린 잎들이

가늘게 몸을 흔들곤 하였다.

 

날이 저물자

내 늑골과 늑골사이

홈을 파고

거머리가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베꼬니아의

붉고 붉은 꽃잎이 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다시 또 아침이 오고

바다가 또 한 번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뚝뚝뚝 천의 사과알이

하늘로 깊숙이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이 가고 또 밤이 와서

잠자는 내 어깨 위

그해의 새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둠의 한쪽이 조금 열리고

개동백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었다

잠을 자면서도 나는

내리는 그

희디흰 눈발을 보고 있었다

 

2.

3월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라일락의 새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산다화를 적시고 있었다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옷속의

일찍 눈을 뜨는 남쪽바다

그날 밤 잠들기 전에

물 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3월에 오는 눈은 송이가 크고

깊은 수렁에서처럼

피어나는 산다와의

보얀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3.

벽이 걸어오고 있었다

늙은 홰나무가 걸어오고 있었다

한밤에 눈을 뜨고 보면

호주 선교사네 집

회랑의 벽에 걸린 청동시계가

겨울도 다 갔는데

검고 긴 망또를 입고 걸어오고 있었다

내 곁에는

바다가 잠을 자고 있었다.

잠자는 바다를 보면

바다는 또 제 품에

숭어새끼를 한 마리 잠재우고 있었다

 

다시 또 잠을 자기 위하여 나는

검고 긴

한밤의 망또 속으로 들어가곤 하였다.

바다를 품에 안고

한 마리 숭어새끼와 함께 나는

다시 또 잠이 들곤 하였다

 

*

 

호주 선교사네 집에는

호주에서 가지고 온 해와 바람이

따로 또 있었다

탱자나무 울 사이로

겨울에 죽도화가 피어 있었다

주님 생일날에는

눈이 내리고

내 눈썹과 눈썹 사이 보이지 않는 하늘을

나비가 날고 있었다

한마리 두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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