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보성댁의 여름/고재종

김욱진 2013. 12. 29. 14:23

    보성댁의 여름

                               고재종

 


살 찔 틈 없이 살 마를 틈도 없이
닭장 밑에서 지샌 듯 새벽같이 일어나
솔가지 꺾어 밥 짓고 마당 쓸고
조반 차리기 전 빨래하고 텃밭 매고
아침은 먹는 둥 마는 둥 밭으로 나가
콩밭 깨밭 고추밭 미영밭 더터
골고지에 풀매기에 북주기에 물대기에
등짝이 죄 타도록 저 홀로 미쳐나다가
엉덩이에 불 붙도록 짧아진 그림자 밟으며
풀 한 짐 이고 돌아와 점심 차리고
갓난애 젖 주고 큰애는 목욕시키고
오후엔 논으로 나가 농약 치고 피사리 하고
웃논 아랫논과 물쌈 하고 물꼬 막고
논두렁 풀 베고 한 벌 두 벌 거름 주고
산그늘 내리도록 저녁별 새하얗도록
이 손이 저 손인지 저 손이 이 손인지
아 그만 세월 모르게 헤매이다가
또 풀 한 짐 이고 돌아와 저녁밥 안치고
쇠밥 주고 쇠똥 치우고 돼지 닭 보이 주고
사랑방의 중풍 든 노인네 똥요강도 치우고
이윽고 오밤중 밥 먹고 샘가에 나앉으면
에라 오살할 놈은 중동 떠난 남정네
여자 속 밴댕이 속이라 해도 좋으니
그래도 그리운 것은 이역만리 서방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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