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여자
고재종
경상남도 고성군 하이면의 상족암에
때 아닌 겨울비 치는 바다,
파도가 고래 떼처럼 몰려온다고 말한
그녀는 거기 홀로 견디는 거다.
그녀와 거기서 좀 지체해도 좋았던 그곳엔
백악기 때의 공룡 발자국과
만권서 쌓은 듯한 퇴적암에 층층 새겨진 세월,
그것과 함께 그곳에선
그녀 가슴에 패인 삶의 사랑의 상처도
빗물 고이는 공룡 발자국처럼 오래
가리라는 것을 짐짓 모른 체해야 한다.
몇 번이고 숨이 턱턱 막혀
그 가슴의 울혈, 퇴적암처럼 더께 얹고 나니
고독은 삶에 대한 경건한 수절이더라며
그녀는 오연한 눈빛이던 거다.
어쩌면 그녀는 일억 년 전까지는 추억되는
무상의 시간들을 보았는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또 만권서보다 더한 것들을
세월 밖에까지 쌓고 싶은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람이 조금만 일어도, 바다가
고래 떼처럼 몰려온다고 말한 것도 그녀다.
난 비 아니라도 온통 젖어 그만이던 거다.
오솔길의 명상 4/고재종
너럭바위에 누워서는
구름 갈기를 좀 바라보고
나무등걸에 앉아서는
황조롱이 노래를 좀 듣자
풀섶에 쪼그리고선
구절초 몇 점을 어루거나
솔둥치에 기대어선
바람소리로 솔솔 흐를까
저 계곡물 소리엔
핸드폰 벨 소리를 지우고
이 둥근 무덤 가에선
시계도 벗어 던져버리면
날다람쥐는 그대로 날을라나
갈참 잎은 그대로 일렁일라나
올 때는 사상을 입었으나
갈 때는 바람으로 풀어진
어느 파르티잔이 있다 하자
바람은 정처도 없다고 하자
동안거(冬安居) / 고재종
목화송이 같은 눈이 수북수북 쌓이는 밤이다
이런 밤, 가마솥에 포근포근한 밤고구마를 쪄내고
장광에 나가 시린 동치미를 쪼개오는 여인이 있었다
이런 밤엔 윗길 아랫길 다 끊겨도
강변 미루나무는 무장무장 하늘로 길을 세우리
푸른 자전거의 때 / 고재종
말매미 말매미 떼 수천 마리의 전기톱질로
온 들판을 고문해대어선
콩밭에서 콩순 따는 함평댁의 등지기 위로
살 타는 훈짐 피어오르는 오후 숲참때
저기 신작로 하학길을
은륜을 번뜩이며 달려오는 막내녀석,
그 씽씽 그 의기양양
문득 허리를 펴다 가늠한 함평댁의 입이
함박만하게 함박만하게 벌어질 때
때마침 목덜미를 감아오는 바람자락과 함께
푸르고 푸른 풋것들이
환호작약, 온각 손사래를 쳐대는 것이었다
수숫대 높이만큼 / 고재종
네가 그리다 말고 간
달이 휘영청 밝아서는
댓그림자 쓰윽 쓰윽
마당을 잘 쓸고 있다
백 리까지 확 트여서는
귀뚜라미 찌찌찌찌찌
너를 향해 타전을 하는데
아무 장애는 없다
바람이 한결 선선해져서
날개가 까실까실 잘 마른
씨르래기의 연주도
씨르릉 씨르릉 넘친다
텃밭의 수숫대 높이를 하곤
이 깊고 푸른 잔을 든다
나는 아직 견딜 만하다
시방 제 이름을 못 얻는
대숲 속의 저 새울음만큼,
성숙 / 고재종
바람의 따뜻한 혀가
사알작, 우듬지에 닿기만 해도
갱변의 미루나무 그 이파리들
짜갈짜갈 소리날듯
온통 보석조각으로 반짝이더니
바람의 싸늘한 손이
씽 씨잉, 싸대기를 후리자
갱변의 미루나무 그 이파리들
후둑후두둑 굵은 눈물방울로
온통 강물에 쏟아지나니
온몸이 떨리는 황홀과
온몸이 떨리는 매정함 사이
그러나 미루나무는
그 키 한두자쯤이나 더 키우고
몸피 두세치나 더 불린 채
이제는 바람도 무심한 어느 날
저 강 끝으로 정정한 눈빛도 주거니
애증의 이파리 모두 떨구고
이제는 제 고독의 자리에 서서
남빛 하늘로 고개 들줄도 알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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