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노숙 외 5편/김사인

김욱진 2013. 12. 29. 14:43

                   노숙 

                   김사인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 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었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2005년 [현대문학상] 수상작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 / 김사인

 

하느님

가령 이런 시는

다시 한번 공들여 옮겨 적는 것만으로

제가 새로 시 한 벌 지은 셈 쳐주실 수 없을까요

 

다리를 건너는 한 사람이 보이네

가다가 서서 잠시 먼 산을 보고 가다가 쉬며 또 그러네

 

얼마후 또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네

빠른 걸음으로 지나서 어느새 자취도 없고

그가 지나고 만 다리만 혼자 허전하게 남아있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라는 시인데

(좋은 시는 얼마든지 있다고요?)

안되겠다면 도리 없지요

그렇지만 하느님

너무 빨리 읽고 지나쳐

시를 외롭게는 말아 주세요, 모쪼록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 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싶어

덜덜 떨며 이 세상 버린 영혼입니다

 

"연전에 작고한 이성선 시인의 <다리> 전문과 <별을 보며> 첫 부분을 빌리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 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어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꼽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고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이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자 잉잉거릴 뿐 갈 곳도 없지
아이들은 오소리 새끼처럼 천하게 자라고
굴 속같이 어두운 토방에 팔 괴고 누워
나 부연 들창 틈서리 푸설거리는 마른 눈이나 내다보겠네
쓴 담배나 뻑뻑 빨면서 또 한 세월 보내겠네
그 여자 허리 굵어지고 울음조차 잦아들고
두 눈에 파랗게 불이 올 때쯤
나 덜컥 몹쓸 병 들어 시렁 밑에 자리 보겠네
말리는 술도 숨겨놓고 질기게 마시겠네
몇 해고 애를 먹어 여자 머리 반쯤 셀 때
마침내 나 먼저 숨을 놓으면
그 여자 이제는 울도 웃도 못하리
나 피우던 쓴 담배 따라 피우며
못 마시던 술이나 배우리 욕도 배우리

이만하면 제법 속절없는 사랑 하나 안 되겠는가
말이 될는지는 모르겠으나.

 

 

 

고향의 누님 / 김사인
 
        한 주먹 재처럼 사그라져
        먼데 보고 있으면
        누님, 무엇이 보이는가요.
        아무도 없는데요.
        달려나가 사방으로 소리쳐 봐도
        사금파리 끝에 하얗게 까무라치는
        늦가을 햇살 뿐
        주인 잃은 지게만
        마당 끝에 모로 자빠졌는데요.
        아아, 시렁에 얹힌 메주 덩어리처럼
        올망졸망 아이들은 천하게 자라
        삐져나온 종아리 맨살이
        차라리 눈부신데요.
        현기증처럼 세상 노랗게 흔들리고
        흔들리는 세상을
        손톱이 자빠지게 할퀴어 잡고 버텨와
        한 소리 비명으로
        마루 끝에 주저앉은 누님,
        늦가을 스산한 해거름이네요.
        죽은 사람도 산 사람도
        떠나 소식 없고
        부뚜막엔 엎어진 빈 밥주발
        헐어진 토담 위로는 오갈든 가난의
        호박 넝쿨만 말라붙어 있는데요.
        삽짝 너머 저 빈들 끝으로
        누님,
        무엇이 참말 오고 있나요.

 

 

상의 한칸 / 김사인


세상은 또 한 고비 넘고
잠이 오지 않는다
꿈결에도 식은 땀이 등을 적신다
몸부림치다 와 닿는
둘째놈 애린 손끝이 천 근으로 아프다
세상 그만 내리고만 싶은 나를 애비라 믿어
이렇게 잠이 평화로운가
바로 뉘고 이불을 다독여 준다
이 나이토록 배운 것이라곤 원고지 메꿔 밥비는 재주 뿐
쫓기듯 붙잡는 원고지 칸이
마침내 못 건널 운명의 강처럼 넓기만 한데
달아오른 불덩어리
초라한 몸 가릴 방 한칸이
망망천지에 없단 말이냐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본다
밖에는 바람소리 사정 없고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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