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한 치마
변희수
우리 할머니 잘하던 말
눈에 넣어도 하나도 안 아프다는 말
눈에 자꾸 밟힌다는 말
비유의 치마폭이 장난이 아니다
비유치고는 참 대담한 비유다
그 덕에 내가 지금 시를 쓰는지도 모르지만
스케일로 따지면 나는 겨우 미니스커트 한 장 정도
눈에 사람을 넣는다는 생각
눈에 한 사람을 넣고 걸어 다닌다는 생각
그런 치마, 나는 감당 못 한다
치마에도 급이 있고 관록이 있고
잘 못 두르면 넘어지고 자빠질게 뻔하다
비유란 치마를 훌러덩 뒤집어쓰듯
비유를 통째로 뛰어넘는 것
비유의 통을 아예 엎어버리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눈에 쏙 들어버리는 것
냉큼 한 눈에 반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잘 모른다
비유가 어디서 오는지
그것이 주체인지 객체인지
부려야할지 모셔야할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치마에서 멀다
눈에서도 멀고 마음에서도 멀고
비유 앞에 서면
아직도 그냥 그런 바지다
껍질과 본질
쳐다도 안 보던 껍질에 더 좋은 게 많다고
온통 껍질 이야기다
껍질이 본질이라는 걸 뒤늦게사 안 사람들이
껍질이 붙은 밥을 먹고 껍질이 붙은 열매를 먹는다
이때껏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이
본질인줄 알고 나도 시퍼런 칼을 마구 휘둘렀다
연하고 보드라운 것에 집착했다
본질은 함부로 닿을 수 없는 곳에나 있다고 믿었다
공부할 때도 연애할 때도 시를 쓸 때도 그랬다
급하게 칼부터 밀어 넣었다
맨살로 덩그러니 나앉은 것 같은 날
허약한 내부를 달래주듯
껍질째 아작아작 사과를 먹는다
잘 씹히지 않는 본질을 야금야금 씹어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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