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자를 불사르다
이인주
꽃대궁 뻗은 산길 벼랑을 탄다
안간힘으로도 잡히지 않는
수직, 천길 아래
흔들리는 뿌리 바위를 뚫어내린 곳
신흥사 계조암을 오른다
세상 모든 근원이 저토록 단단한 침잠이라면
한 잎 갈대에 기댄 내 등은
새삼 얕은 바람에도 어찌할 바 모른다
캄캄한 억겁 오래 전에 건너온
인연 하나가 내 안에서 간당거린다
이 해독할 수 없는 약한 끈이 나를 지탱해온 명줄이라니!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풍상고초가
절벽에 내리 찧는 단풍으로 쏟아진다
그 풍경의 안쪽
수만 겁 흔들림을 쌓아 만들어진 암자가 있다
마른 나뭇가지 찬 바위에 불꽃을 피우는
영묘한 금당
해거름이 눙치는 빛과 어둠의 은밀한 교합
화들짝 벙그는 한 송이 꽃으로 설악은 있다
뜨거운 공양, 산그늘 한 채 고스란히 살랐다
숨어 피던 명자나무 사뭇 몸 달아
발부리 어쩔 줄 모르는 흔들바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