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사람의 숨은 독자를 위하여
노향림
함박눈발이 아파트 창에 부딪는 날
혼자 넋 놓고 창밖을 바라보는데
6동 반장이 벨을 누른다.
긴급안건으로 모두 모이는 반상회란다.
처음으로 참석해 출석 사인을 하는데
이를 본 한 여성이 어마 시인이시네요,
젊은 날 쓰신 수필집 애독자였어요.
옆자리 중년 여성도 한 마디 한다.
요즘 시는 시인들끼리만 본다던데요.
아직도 시를 읽는 독자 있어요?
그럼요, 단 한 사람의 독자가 있을 때까지
시인은 시를 쓰지요, 말해놓고 나는
눈 오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단 한 사람의 숨은 독자는 바로 그 시를 쓴
시인 자신인 걸요.
목젖까지 차오르는 이 말 뒤로
한결 더 소리 낮춰 절규하듯 내리는 함박눈
나는 슬그머니 회의 시작 전에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차선도 보도블록도 경계가 지워진 雪國
차량이나 지나가는 사람조차 보이지 않는
하늘과 땅 사이가 넓은 백지의 대설원이다.
그 백지의 시 몇 줄에 필생을 건 나는
언제나 긴급안건은 그것뿐이라고
나는 내 시의 독자다, 혼자 소리친다.
공중에서 놀란 눈발들이 한꺼번에 부서져 내린다.
‘출입금지’ 팻말을 단 아파트 화단 목책 너머
눈 뒤집어쓴 키 큰 나무들의 적막한 발등에
나는 그만 시 한 줄을 꾹꾹 찍고 돌아 나온다.
—《현대시학》2016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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