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 보관소
마경덕
저 라일락향기는 오래전, 라일락의 첫 나무가 전해준 체취
잘 보관하라는 어미木의 당부가 있었다
몸속의 통로가 열리고 줄기들은 집요하게 허공의 틈을 파고든다
깊숙이 밀봉된 보관소 문이 열리고, 이때
무차별 향기가 살포된다
뒤이어 밀려드는 아카시아, 쥐똥나무의 공략에
한발 서둘러 피는 향기들
비슷한 향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흰빛과 보랏빛의 완벽한 순도純度
서로의 냄새에 취해 비틀거려도 나무들은 한 점 몸을 섞지 않는다
혹여 변질될까, 꼼꼼히 계절의 눈금을 분류하고
온도와 습도까지 맞추었다
판매책인 바람이 해마다 함량을 체크했지만
유사품이 발견된 적은 없었다
사월의 밤을 일시불로 구입하고 소모하는 골목
허공이 제 몸에 향수를 뿌리는 계절엔
어둑한 골목에 오래 서 있고 싶다
한 장의 봄을 주워들고 라일락의 감정을 이해하는 밤
깊숙이 보관된 첫 기억에
울컥, 가슴이 젖는다
지폐보관소인 마늘밭에 이어
가짜 양주를 쌓아둔 창고가 발견되었다고
저녁뉴스가 소란하다
숨겨둔 악취를 카메라가 들추고 있다
시집『글러브 중독자』2012. 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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