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을 끌고 간다
박남희
둥근 것이 노을을 끌고 간다
노인은 자전거에 누런 호박을 싣고
저무는 뚝방길을 간다
익어가는 아침은 눈부시지만
익은 저녁은 슬프다
익은 것은 때때로 노을이 된다
노을에 호박이 익고
호박 속에 든 여자가 익는다
얼마 전에 주민등록증이 말소된 여자
비로소 둥근 여자가 익는다
노인은 노을을 매달고 달린다
생의 굴절이 때로는 저토록 아름다운 것인지
슬픈 것인지, 저문다는 것은
꺾여진 빛을 온 몸에 매다는 것이라는 것을
자전거는 아는지
몸 밖의 굴절과 몸 안의 굴절이 만나서
노을이 된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인은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저녁 어스름 길을 가고 있다
ㅡ『고장 난 아침』2009, 애지
'♧...참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바퀴를 보면 안 굴리고 싶어진다 /김기택 (0) | 2010.07.04 |
---|---|
장미는 손님처럼/문성해 (0) | 2010.07.01 |
성탄제/김종길 (0) | 2010.06.10 |
강우/김춘수 (0) | 2010.06.10 |
서해/이성복 (0) | 2010.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