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날
장옥관
칼날이 무뎌 햇빛에 비춰보니
주름살지듯 잡힌 자잘한 흠집투성이
무, 파만 써는 부엌칼인데 왜 날이 나가는 걸까
면도날 입에 넣고 씹는 깻잎머리 소녀처럼 배추, 당근이 우물우물 쇠 씹
는 취미 가진 건 아닐 텐데
흰 종이에 자주 손가락 베이는 나로선
칼이 풀을 베는 게 아니라
이슬이 풀잎을 벤다는 걸 믿을 수밖에 없고
도마가 칼날을 물어뜯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천둥이 구름 속에서 우는 소릴 듣지 못한 귀머거리거나 돌멩이 속에서 새
소리를 꺼내보지 못한 사람들일 터
칼의 날이 빠지는 건,
수십 년 몸 섞은 내연의 관계에도 가차 없이 쑤셔 박히는 게 칼이라 해도
때로는 숫돌에 몸 맡기고 싶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기에 숫돌도 그 마음 알고 순순히
제 부드러운 살점을 떼어
칼날에게 먹히는 것 아니겠는가
―계간《문학선》, 2015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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