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명함 유감/고희림

김욱진 2016. 8. 30. 19:27

         명함 유감

          고희림

 

 

프레스에 눌려 납작하게 엎드린,

숫자와 문자들로 구워진 한 개인사는

당신의 그 물갈퀴 같은 손바닥을

타고 내게로 건너오기 전

당신의 가죽비린내 지갑 속에서

얼마나 흔들리고 터지고 싶었나요

당신이 허공으로 내다 걸 깃발

당신이라는 종이폭죽 말이에요


햇살 아래 반짝,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마찬가지였겠지만

나와 당신의 교류는 순식간에 이번 한번이거나

조롱이거나, 서로에게 미쳐버리거나 할 수도 있을텐데

껌 씹는 문장들까지 나서서

어떻게 그렇게 삽시간에 건너왔을라구요

이런 생각, 당신의 그 찝찝한 착각 같은 종이인간 말이에요


<시인소개>

고희림은 1960년 원주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라서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99년 문예지“작가세계”를 통해 등단했다. 대구경북작가회의 부회장, 시월문학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며 ‘평화의 속도’, ‘인간의 문제’, ‘대가리’, ‘가창골 학살’ 등의 시집이 있다.


<해설> 김연창 시인

철학자는 거시적 관점에서 인간관계를 맺는 것 자체가 정치행위라고 한다.

명함이란 아주 내밀한 관계를 원할 땐 주고받지 않는 것이다.

연인들이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명함을 주고받지는 않는다.

명함은 그 안에 활자들처럼 딱 그만큼만 상대방에게 알려주기 위한

정치적 행위, 즉 비즈니스를 위한 장치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다면 명함은 서로가 길들이기 위한 첫 단계일 뿐이겠다.

시인의 눈에 포착된 것은 명함의 표면이 아니라 내면이다.

웃는 얼굴로 종이와 활자를 주고받았지만

서로의 깊은 심상은 숨기고 웃고 있는 찝찝한 착각임을 예리하게 도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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