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법거량法擧量의 변주
이 태 수 <시인>
ⅰ) 김욱진의 시는 더 나은 삶을 향한 자기성찰과 자기탐구에 무게중심이 주어지지만, 사회학적 상상력을 근간으로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파토스pathos들을 희화화戱畵化하거나 해학적諧謔的으로 떠올리면서 ‘긴장된 언어유희’와 능란한 언어연금술의 재치로 의미망의 깊이를 되레 강화하는 미덕을 떠올리는 점도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시인이 자연과 사람들 속으로 스며들어 서정적 자아를 길어 올릴 때는 휴머니티humanity로 착색된 따스한 가슴 열기로 사랑과 연민憐憫의 정서를 떠올리는가 하면, 상대적으로 서정적 자아가 내부로 향할 경우에는 불교적 사유思惟를 바탕으로 한 형이상학적인 이데아 추구와 불성佛性에 이르려는 구도求道에의 길 찾기에 초점이 맞춰지는 양상을 띠고 있다.
언뜻 보면 그의 시편들은 말이 말의 꼬리를 물거나 능청스럽고 의뭉한 기지機智로 번득이는 어조語調가 강한 인상으로 다가오고, 언어가 거느리는 미묘한 뉘앙스를 의미망과 절묘하게 연계시키는 감각의 첨예성이 강조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도 거의 어김없이 궁극적으로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열어 보이려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또한 희화화와 역설적인 해학의 이면에는 불도佛道 수행과 시詩에의 길을 수행승이 주장자拄杖子를 짚고 가듯 ‘구도에의 물음’을 짚어가는 의두疑頭를 통해 높고 깊은 이데아의 세계를 시적으로 구현하고 성취하려는 꿈에 불을 지피는 모습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ⅱ) 시인은 「못다 한 말—골방에서」를 통해 시인으로 살아가는 비애悲哀와 시가 소외되는 현실을 자장면 값에 빗대어 자조적自嘲的으로 토로한다. 굶으면서까지 자장면 세 그릇 값으로 시집 한 권을 사던 가치관 탓으로 시인이 된 그가 시인으로서는 “신세타령만 하는 비렁뱅이”로 살아가야 한다는 비감에 젖게 하는 건 그 당시가 시집 한 권 값이 지금의 세 배나 됐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바뀌었다. 물질적으로는 궁핍해도 정신문화를 숭상하던 옛날 정서와는 달리 배금주의拜金主義, 물질주의가 만연하는 오늘의 세태世態 속에서 시인으로 살아가기란 안팎의 소외감과 박탈감에서 자유롭지 못한 ‘골방’ 신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오늘날 시인의 길은 돈과는 물론 명예와도 거리가 멀고, 그 사정이 나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형국이다.
실제 시인은 어느 시낭송회에서 그런 세태를 절감해야 했다. 「참꽃시회詩會」에서 옛 노래 공연이 끝나자 공연장을 가득 메웠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시들시들해진 참꽃처럼 / 시인들만 소복 모여 앉은” 광경을 목도했다, 그러니 “넋 나간 꽃인 양 / 참, 좋다 / 참, 좋다 / 텅 비어서 참, 좋다”고 자조하고, “발품 팔아먹고 사는 나의 시는 / 피어 보지도 못한 채 /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말이 어찌 안 나올 수 있었겠는가.
유명 시인 헐값에 다 팔아먹고
이젠 골방으로 밀려난 시의 집들마저
경매로 넘겨야 할 판이니
내게로 와 굶어죽은 시혼들이여
지렁이처럼 구불텅구불텅 기어가다
걸려 넘어지고 잘리고 짓밟힌 숱한 문장들이여
—「못다 한 말—골방에서」 부분
하지만 시인은 숙명처럼 시를 쓰면서 비애와 연민을 삭여야 한다. 자신보다 먼저 알려진 시인들의 시집을 처분해 버렸다는(어쩌면 넘어서기도 했겠지만) 자괴감自愧感에 젖고, 골방으로 밀려난 ‘시의 집’(시집)들마저 새 주인을 만나면 넘겨야 할 판인 정황을 아파하면서, “내게로 와 굶어죽은 시혼”이라고까지 자책감自責感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시를 쓰는 자신을 향해서는 창작 과정의 고뇌와 고통을 ‘기어가는 지렁이’에 비유하면서 숱하게 “걸려 넘어지고 잘리고 짓밟힌” 문장들에 대한 애착과 연민을 감추지는 않는다.
그 연민과 애착은 또한 “그대 못다 한 말, 못다 한 저녁의 풍금소리 / 언제쯤 울려 퍼질 것인가”라는 기구祈求로 이어지고, “골방에 골백번 더 처넣었다 건져낸 말 / 아, 누가 숨은 상상과 행간의 말들을 읽고 갈까”라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에도 연결고리를 달게 한다. 이 기대와 소망은 시의 진정한 독자를 향한 것이면서도 정신문화의 가치 회복을 겨냥한 절절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게다가 가장 절박하게는 “골방에서 말을 잃는” 밤을 지세기 일쑤인 시인에게 ‘나의 집’은 곧 ‘나의 시집’이라는 등식을 떠올려 그 호소력을 더욱 고조시킨다. 그렇다면 자신의 집이 곧 자신의 시집이라는 시인에게 시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버릇없이
나도 아닌 것이
나처럼 달라붙어
나를 먹는 놈
곰살갑게 굴 때는 귀엽더니
이제는 나를 먹잇감으로 넘보기까지
그렇다고 모르는 척하기도 뭐하고
붙잡아 둘 수도 없는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나
더부살이하는 나를 향해
절박한 심정으로 물어본다
나 먹는다는 건
꼭꼭 숨은 나를 찾는 일
때로는
깜빡깜빡 까먹고
나도 모르게 헛구역질하는
그놈의 나는 대체 누구인가
—「그놈의 나‧1」 전문
시인으로서의 자기성찰에 무게중심을 둔 이 시는 시인과 시의 함수관계에 천착穿鑿하면서 시를 일단 “버릇없이 / 나도 아닌 것이 / 나처럼 달라붙어 / 나를 먹는 놈”이라고 한다. ‘나’와는 별개의 존재인 ‘시’가 무례하게 ‘나’처럼 달라붙어 ‘나’를 먹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 ‘시’가 “먹어도 먹어도 / 배부르지 않는 나”라는 존재로 발전하면서 ‘나’가 ‘시’를 먹는 데 그치지 않으며, 다시 ‘나’가 되레 ‘시’에 ‘더부살이’를 하게 되는 반전反轉으로 ‘나=시’ 또는 ‘시=나’라는 등식을 빚어놓는다.
“나 먹는다는 건 / 꼭꼭 숨은 나를 찾는 일”이라는 대목에 이르면 ‘시’가 ‘나’를 먹는다는 것, 다시 말해 ‘나’가 ‘시’를 쓴다는 것, 또는 ‘시’와 ‘나’가 하나로 어우러진다는 건 결국 자기성찰과 자기탐구로 본래의 자신을 찾는 일이라는 결론에 닿는다. 그럼에도 또 다시 “나도 모르게 헛구역질하는 / 그놈의 나는 대체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여운을 남기는 건 ‘왜’일까. 아마도 시를 쓰고 시와 더불어 산다는 것은 더 나은 삶을 향한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자기탐구에의 질문(회의)이라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놈의 나‧2」에서는 또 다른 시각으로 ‘나=도둑’이라는 등식을 제시하면서 ‘도둑’인 ‘나’는 일상화된 도둑질을 하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주인 없는 집 돌아다니며
주인 행세 하였고
때로는 주인 앞에서도 버젓이 훔쳤다
그러나 주인은
한 번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놈은 나의 종이었고
나는 그놈의 주인이었다
그놈의 나는 도둑이었다
—「그놈의 나‧2」 부분
고 성찰한다. 이 시에서 보면 ‘나’인 ‘도둑’(그놈)이 ‘주인’(시) 없는 집들을 돌면서나 주인 앞에서도 버젓이 도둑질해도 주인은 방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그놈=도둑’이라는 등식이 다시 바뀌어 버린다. “알고 보니 그놈은 나의 종이었고 / 나는 그놈의 주인이었다”는 대목에서 보듯 ‘나’와 ‘그놈’은 다른 인물로 나뉘어져 ‘주인’과 ‘종’으로 그려지는가 하면. ‘나’와 ‘도둑’이 같은 인물이 아니라 ‘나’와 ‘도둑’이 되면서 ‘그놈’이 ‘시’로 둔갑해 버린다.
그렇다면 ‘주인’이 아니면서 ‘주인 행세’를 하던 ‘나’(도둑)가 거꾸로 ‘주인’이 되고, ‘그놈’(도둑)이 ‘나’의 ‘종’이 됨으로써 ‘그놈=도둑=시’로 전도되어 ‘그놈’인 ‘시’가 ‘나’에게 되레 ‘도둑’이 돼 ‘나=시’ 또는 ‘시=나’라는 등식을 가능하게 해 궁극적으로는 앞의 시 「그놈의 나‧1」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어찌 보면 또 ‘그놈의 나’는 ‘나의 그놈’이 되기도 하고, ‘나’에 대한 비아냥거림으로서의 ‘나’를 지칭하는 뉘앙스로 읽히게 한다.
ⅲ) 김욱진의 시는 한 편 한 편 읽을 때마다 재미를 더해준다. 말놀음을 하는가 싶으면 어느새 자연에 순응하는 길을 찾아 나서고, 곡진한 삶에 대한 연민을 쏟아 붓는가 하면 그로 인해 생긴 아픔들을 온전히 시인 자신의 몫으로 삭혀버린다. 시인의 말꼬리 잡기를 따라나서며 신나게 웃다가도 정신이 번쩍 드는 까닭도 그런 반전反轉의 유연성들 때문이다. 더구나 그의 시는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어조나 첨예한 언어감각으로 언어가 거느리는 뉘앙스들을 의미망과 절묘하게 연계시켜 호소력을 증폭시키는 매력을 발산하기도 한다.
「등나무」는 그 한 본보기다. “등 돌리고 달아나는 / 봄기운 불끈 잡아당기다 / 낭패를 본 나무는 안다 / 속 얼마나 썩어야 등이 휘는지를”라고 운을 떼는 「등나무」는 “양지의 등쌀에 떠밀려 / 찬밥 신세가 되어본” ‘사람’과 속을 비우고 거센 바람에 허리 삐끗해본 ‘나무’를 교차해서 바라보면서 전혀 다른 의미의 ‘등’자를 달고 있는 ‘등나무’와 접맥시켜 시적 묘미를 돋우는 한편 의미망을 확대하고 강화하는 효과를 끌어낸다.
등나무의 등이 얼마나 유연한 지를
등성이 한 뼘 먼저 오른 등이
아등바등 뒤따라오는 등 묵을 방 비워주고
한평생 등 굽히며 살아온 등나무
누군가에게
등 한 번 돌린 적 없는 사람은 안다
올곧게 사는 길이 얼마나 고단한 지를
—「등나무」 부분
‘등’이라는 한글 어휘를 중심에 두고 이 낱말을 사람과 나무에 번갈아 ‘돌리다’, ‘휘다’, ‘묵다’, ‘굽히다’, ‘올곧다’ 등의 동사나 형용사와 연결시키거나 ‘등’자 돌림의 ‘등나무’, ‘등성이’, ‘아등바등’ 등의 낱말과 접맥시켜 그 묘미를 신선하게 살려내 보인다. 특히 이 시는 ‘사람’을 ‘나무’로, ‘나무’를 ‘사람’으로 바꿔 읽어도 좋도록 언어를 배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유연한 ‘등나무’를 주역으로 내세우면서도 ‘고단하지만 올곧게 사는 길’에 대한 일깨움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어 이 시인의 언어 구사가 얼마나 능란한지를 엿보게 한다.
이 시와는 달리 「병」은 요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갑甲질’에 착안해 ‘을’과 ‘병’까지 동원해 이들의 희화화를 통한 사회적 병폐를 암시하면서도 ‘남 탓’으로 들리지 않고 자신에게로 그 화살을 돌리고 있다. “갑(甲)으로 돌아가(回) 보니 / 나는 갑도 을도 아닌 병”이었고, 그 ‘병丙’을 전혀 뜻밖의 신체적인 ‘병病’으로 바꿔놓는 점은 더욱 그렇다. 그 ‘병’을 또한 자신의 ‘잔병치레’, ‘꾀병’ 등과 엮어 “어릴 적부터 / 잔병치레 잦던 내가 / 갑을 사이에서 / 여태 살아남은 이유는 / 병이 갑 노릇하며 / 꾀병 부린 나를 / 다독거려주었기 때문”이라는 기지와 재치 역시 전혀 예사롭지 않다.
시인의 이 같은 희화화의 상상력과 재치는 척추 디스크를 “먹잇감 찾아 / 내 몸속까지 파고든 쥐”로 보고 “한평생 일궈놓은 쥐꼬리 만 한 텃밭에서 / 나를 실험하는 쥐 / 십 미터도 못 가서 주저앉고 마는 나는 / 쥐의 아바타”(「쥐의 아바타」)라는 발상, 자신을 ‘돌’에 비유한 「돌」에서는 “돌이 없다, 도리 없다”거나 「몸옷 한 벌」에서 육신을 “부모로부터 잠시 빌려 입은 몸옷 한 벌”, 그것도 바람벽 한 모퉁이에 걸려 있는 “누더기 옷 한 벌”로 표현하는 등 그 덕목德目들을 열거하자면 한량이 없을 정도다.
「한두레」에서는 건물 옥상의 ‘고무 다라이’에서 자라는 채소들을 의인화하면서 “옹기종기 섞여 사는 다문화가족”으로 본다든가, 「청도 소싸움장」에서 “선거유세장보다 더 뜨거운 꼭두각시 놀음판”이라고 보는 시각, 세월호 참사를 그린 「덫에 걸린 아이들」에서 선장이 악마의 덫을 놓아 아이들이 부활절이 지나도 살아 돌아오지 않고, 석탄일에도 환생의 꿈을 접지 않은 아이들의 문자메시지만 살아남아 돌아왔다는 비판적 시각을 보이면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와 병폐를 다각적으로 꼬집는다. 또 근래의 경주 강진强震을 “또 다른 분단 위기”로까지 본 「긴급 뉴스」에서는 더욱 준열하고 거시적인 시선으로 우리 사회를 향해 비판의 화살을 날린다.
북한 핵실험이니 사드 배치니
대기업 부도니 판검사 비리니 하는 것들은
한낱 소꿉장난에 불과했다
그토록 열 받던 여름
편 가르기 하는 세상 밖으로
일제히 뛰쳐나온 떨림의 목소리
새 판을 짜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다보탑은 잠든 돌부처를 흔들어 깨웠고
첨성대는 사바세계의 고통을 뼈저리게 전했다
땅 위에선 남북과 영호남이 힘겨루기를 하고
땅 밑에선 유라시아판과 태평양판이 으르렁거리는 한반도
소통 부재는 지신까지 노하게 한 걸까
쩍쩍 갈라진 땅과 맞닿은 민심
하늘의 뜻임을
부글부글 끓어오른 기운 식히고 지나가는
추석 보름달이 둥글게 웃으며 전했다
—「긴급 뉴스」 부분
사족을 달 필요가 없을 정도로 신랄하게 쓴 소리를 토해내는 이 시는 갖가지 비리나 편 가르기와 맞서기의 와중에 일어난 강진이 많은 사람들의 새 판 짜기에의 몸부림이며, 상처 입은 다보탑이 돌부처를 깨우고 첨성대가 우리 사회의 고통을 뼈저리게 전했다는 메시지를 떠올린다. 게다가 국제정세도 소통 부재의 악화일로여서 지신地神이 노하고 그 땅과 맞닿은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임을 보름달이 둥글게 웃으며 전했다는 대목은 지도층은 민심을 받들어야 하고 우리 사회는 보름달처럼 둥근 포용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발언에 다름 아닌 것으로 읽힌다.
시인은 그런 조짐과 기미를 자신과 늘 가까이 자리 잡고 있는 산에서 봄 사월에 붉게 피어오르는 참꽃을 통해 느끼고 있으며. 그 피어오르는 참꽃의 개화를 ‘참, 조용한 혁명’이라고 그 의미를 극대화해 마지않는다.
거짓과 혼돈이 난무하는 세상, 참
꽃으로 뿌리내린 비슬산
사월의 민심은
아래서부터 위로
붉게 붉게 번져
천심을 사로잡았다
보이지 않는 손들의
참, 조용한 혁명이다
—「참, 조용한 혁명」 전문
간결하고 투명하며 단아한 문맥에 강력한 에너지를 다져넣은 듯한 이 시는 지난 4월의 국회의원 선거 민심을 연상케도 한다. ‘4월’의 의미를 시인이 근래에 가장 가깝게 체험한 인유引喩로 끌어들인 경우라 할 수 있다. 거짓과 혼돈이 난무하는 세상도 때가 되어 참과 질서가 뿌리내린 토양 위에서 아래서 위로 오르는 민심(보이지 않는 손들)과 함께 번져 오르면 천심을 사로잡는 혁명이 조용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시사示唆로 받아들여지게 한다.
어떤 메시지를 담든 시는 주의나 주장을 그대로 드러내기보다 정서화해서 보여주는 언어예술이다. 언어를 매개로 하기 때문에 언어를 통해 ‘존재의 집’을 짓는 데는 내용(의미) 못잖게 형식(언어미학)도 중요하다는 건 상식이다. 하이데거가 일찍이 ‘언어=존재’라고 설파한 바 있지만, 조금 다른 측면에서 보더라도 의미를 새롭고 아름답게 떠받들어 주는 건 언어미학(언어연금술)의 몫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김욱진의 언어 운용은 돋보이며, 특유의 언어미학이 개성을 강화해 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거듭 B2을 꾹꾹 눌렀다
닫힌 문이 열렸다 다시 닫혔다
이승에서 발 꽁꽁 묶인 엘리베이터
긴급호출 버튼에 빨간 불이 켜졌다
저승이 코앞에 닿은 그 할아버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더니
환생하는 기차 어디서 타느냐고
다급히 내게 물었다
—「환승」 부분
산은
살았던, 살아 있는, 살
것은 모두 산이라 그런다고 그러시네요
살아서 한평생 사는 것도 산 것이고
죽어서 한평생 사는 것도 산 것이니
산은
이처럼 둘이 아닌 하나로
사는 것은 다 산이라 그러시네요
—「산, 그러시네요—고故 박달원 선생님」 부분
「환승」중 인용 부분에서 볼 수 있듯, 화자가 지하철 마지막 역에서 버스로 환승換乘하기 위해 지하 2층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만난 구순 노인과의 에피소드를 해학적으로 그리고 있다. 노인이 같은 층 버튼을 거듭 눌러 닫힌 문이 열렸다 다시 닫히며 빨간불이 켜지는 모습을 희화화하고 있으며, ‘이승’과 ‘저승’, ‘환승’과 ‘환생還生’이라는 어휘로 재치 있게 언어유희를 하는 듯하지만 그 이면에는 삶과 죽음에 대한 짙은 파토스가 저며 있다.
저승이 코앞인 노인의 이승 머물기가 같은 층에 발이 묶인 엘리베이터 속이고, 버튼 누르기를 멈추고 한 발자국 물러선 노인의 다급한 물음이 ‘환승’을 ‘환생’으로 발음하는 바람에 한층 극화되기에 이른다. 김춘수가 “시는 언어유희지만 긴장된 언어유희여야 한다.”고 한 말을 떠올리게 하는 경우다.
「산, 그러시네요」는 ‘산山’과 ‘살다’라는 어휘의 다양한 변용을 통해 그 의미와 시적 묘미를 돋우어내는 작품이다. ‘산’과 ‘살다’의 과거형, 현재형, 미래형의 뉘앙스를 접목시키면서 그 모든 게 ‘산’이며, 살아서든 죽어서든 한평생 한결같이(둘이 아니 하나로) 사는 게 ‘산’이라는 ‘긴장된(철저히 의도된) 언어유희’를 통해 ‘삶’과 ‘산’의 의미를 새롭게 살려놓고 있다.
ⅳ) 시인은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물이나 풍경, 그 어떤 일들도 특유의 감성과 감각으로 포착하며, 그 이면에는 어김없이 흥건한 휴머니티와 따스한 연민의 정서가 깔려 있다. 「등나무 사는 얘기」와 「그늘」은 앞서 언급한 「등나무」에서와 같이 등나무와 연계해 특유의 상상력을 펴고 있지만, 그 뉘앙스가 또 다르게 한층 확산되고 있다. 계산성당 맞은편(계산성당 경내)의 휴식공간에 지붕처럼 얽혀 있는 등나무 넝쿨을 “등줄기 뻗어 기둥 세우고 지붕 덮고 사는 / 등나무 집 한 채”로 바라보는 시인은 이 공간을
해 달 별 번갈아 와서 자고 간다
소소한 집안일은 손수 다하고
바깥일은 제집처럼 드나드는 새들이 다 봐준다
등꽃 흐드러지게 핀 봄이면
사랑 고백하는 청춘남녀 머리 위에 꽃비 내리고
굽은 등이라도 한번 쭉 펴고 싶은 여름이면
오갈 데 없는 노숙자들 하룻밤 묵을 처소 되어주고
소슬바람 부는 가을이면
외진 길 구불구불 돌아가는 시인들
낙엽 무질고 앉아 한참 머뭇거리다 가는 곳
등골 오싹해지는 겨울이면
등신처럼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 등에 업고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간 곱사등이
꼬불꼬불 되살아 곱사춤 덩실덩실 추는 곳
—「등나무 사는 얘기」 부분
이라고, 그 사계의 모습과 포용력을 아름다운 상상력으로 부각시킨다. 대개 특정 사람들이 전유물로 쓰며 사는 ‘집’이라는 공간을 끌어들여 휴머니티를 확산시키는 우주감정宇宙感情으로 이 공간의 의미를 거시적인 무한대의 공간으로 변용시켜 놓는다. 특히 마지막 구절 “주인은 태어날 적부터 등이 굽었다”가 암시하는 바와 같이 ‘등을 굽히는 미덕’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시인에 의해 그 아름다움이 극대화된 등나무 넝쿨은 해와 달과 별이 번갈아 자고 가는 곳이며, 시도 때도 없이 새들이 봐(지켜)주는 곳이자 계절 따라 청춘남녀, 노숙자, 시인들 등 어느 계층, 어떤 유형의 사람들이라도 그들의 개성이나 속사정까지 최상의 상태로 포용包容해 주는 곳으로 그려져 있다. 하지만 사계 중 겨울에는 등나무가 스스로 ‘등신’처럼 ‘곱사등이’가 돼 곱사춤을 추는 것으로 그리는 그 마음자리를 깊이 새겨 읽어야 할 것이다.
등 굽은 할머니 두 사람이 등나무 아래서 마주보고 앉아 주고받는 얘기를 엿듣고 쓴 「그늘」은 등 굽은 노인들이 더욱 등을 굽히며 살 수밖에 없는 세태를 에둘러 고발(?)하고 있는 듯하며, 오늘의 노인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반추反芻해보게도 한다. 한 할머니가 “지난번 디스큰가 뭔가 튀어나왔다더니 / 수술은 했어?”라는 물음에 그 할머니의 대답은 시인의 마지막 구절에서의 표현대로 “그늘 드리워진 등 한쪽, 써늘하다”지만 등이 써늘해지는 게 어디 그들뿐이겠는가.
아니, 가끔 다리 좀 저려도
그냥 등 굽히고 살기로 마음먹었어
드나나나 등 굽히고
꾸벅꾸벅 절하며 지내보니
아들 딸 며느리도 좋아하고
손주 녀석들까지 다 좋아하던데, 뭘
등 꼬장꼬장 세우고 살 때보다
용돈받기도 영 수월하고, 하여튼 그래
—「그늘」 부분
‘등 굽힘’을 ‘절’로 바꿔 그런 자세로 살아야 하는 삶의 비애를 처연하게 그린 이 부분은 고령화 사회를 넘어 고령 사회로 가는 오늘날 세태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데 그치지 않고,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노인 문제를 향한 심각한 물음에 다름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한다.
시인은 또한 지하철에서 “지팡이 짚은 꼬부랑 할머니가 전철 안으로 들어서자 / 노약자석에 앉아 있던 백발의 할아버지가 자리를 양보”하는 장면, 이어서 결혼 광고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 할머니와 그 앞에 서서 그 할머니를 유심히 내려다보고 있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면서 “그 사이 봄날은 / 안지랑 곱창골목을 쏜살같이 빠져나갔다”(「봄날은 갔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 급속한 장면전환은 백발 할아버지와 꼬부랑 할머니의 동상이몽적同床異夢的인 로맨스를 잠시 떠올리다가 이내 그 이면의 쏜살같이 가는 봄(세월)을 들여다보는 것은 연민이 야기하는 삶(생성과 소멸)에의 비애에 다름 아니며, 현재진행형이 바로 과거형이 돼 버린다는 인식의 소산으로도 보인다.
가족에 대한 시인의 시선은 더욱 절실하고 애틋하다. 죄우익 이념의 회생양이 되었던 아버지에 대해서는 할아버지가 고용나무에 감나무를 접붙이듯 “비알 밭에다 면소 다니는 아버지 눈마저 접붙였”(「접붙이다」)기 때문이라며 다음과 같이 절규하고 있다.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좌익으로 몰려
하루가 멀다 않고 감시의 눈초리 피해 다녀야만 했던 아버지
부득이 왼 눈을 떼다 오른 눈에 다급히 접붙였다
서로 다른 두 눈 만나 한 뿌리 내리고 사는 길 틔우며
밭떼기 머슴 노릇하던 아버지
그 이듬해 된서리 맞고 말문 닫더니 눈 감으셨다
고욤나무에 아버지 주먹 같은 먹감 주렁주렁 달렸다
일찌감치 좌우익 바람 스쳐지나간 고향 마을
환갑을 눈앞에 둔 나의 기억 속에는
아직도 마흔일곱 먹은 아버지 먹감나무 앞에서
어린 고욤나무 눈물 닦아주고 서계신 아버지, 먹먹하다
—「접붙이다」 부분
이념 대립으로 인한 비극을 고욤나무에 감나무를 접붙여 감나무(먹감나무)가 된 사연으로 이입시켜 상징象徵 기법으로 형상화한 이 시는 좌우익이 뭔지도 모르던 어린 시절의 엄청난 비극을 환갑 가까운 나이가 된 지금도 고욤나무에 달린 먹감들을 바라보면 먹먹해질 수밖에 없는 심경을 여실하게 그려놓았다. 기억속의 그 아버지는 마흔일곱 먹은 먹감나무이며, 접붙이기 전 고욤나무의 눈물을 닦아주며 서 있는 먹감나무로 보이니 오죽하겠는가.
한편, 어머니는 한恨 많은 전통적 여인상으로 그려진다. “마실 나갔다 신물 다 빠진 월남치마 얻어 입고는 / 새 옷 샀다며 식구들 앞에서 자랑”(「새 옷 한 벌」)하고, 자식 위해 명당 찾아다니며 “자나 깨나 합장하고 엎드려 절만 하”(「기도발」)지만 자식에게는 “철철이 새 옷 사주”(「새 옷 한 벌」)는 어머니다. 게다가 남편을 여의고 “다랑논 서마지기 부쳐 먹는 빌미로 / 치매든 팔순 종조부까지 모시고 산”(같은 시) 분이다. 그런 어머니가 팔순 반고개 훌쩍 넘으면서는 치매에 걸려 안타까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경로당 고스톱 판만 벌어지면
명당자리 차고앉아
싸 붙인 똥은 소리실댁이 다 주워 먹는다네요
그 끗발로 한 푼 두 푼 노잣돈 모으시는 어머니
밤마다 십 원짜리 동전 세는 재미 솔솔하시답니다
—「기도발」 부분
이 처연하고 역설적인 해학 속에는 짙은 연민과 시인 특유의 사랑법이 자리매김한다.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해 시렁 위에 얹어둔 제삿밥을 고양이와 생쥐 등이 다 먹어 버려 “저승 계신 할머니 / 내년 이맘때까지 또 쫄쫄 굶으시겠다”(「고양이 밥을 주다」)고 하는 마음자리나 아내를 향해 “9회 말 투 스트라이크 쓰리 볼 상황에서 / 겨우 허황된 꿈 한 방 날렸”(「스트라이크와 볼 사이」)다며 “삼십 년을 함께 살고도 당신의 볼 가늠하지 못한 죗값”(같은 시)이라고 자신을 돌아보는 마음 역시 아름답다.
가난하지만 따뜻했던 시인의 가족사와 그 공동체의 포근한 모습은 장학금 턱으로 받은 암염소 한 마리를 키우고 번식시켜 학비를 미련하고 그 바람을 타고 온 마을이 염소 키우기로 수입을 올리게 됐다는 「한두레마을 염소 이야기」, 자식을 ‘열 낳아 일곱 건진’ 할머니의 두루뭉술 주먹구구 셈법을 지금 세태에 빗대어 예찬한 「어떤 셈법」, 먼 섬나라에 가 있는 딸과의 카카오톡 주고받기의 즐거움을 그린 「꾸벅, 절하는 섬」 등에도 다채롭게 묘사돼 있다.
ⅴ) 시인의 길나서기는 대체로 두 가지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 하나는 자연과 사람들 속으로 스미기에, 다른 하나는 불교적 사유와 그런 세계 인식을 근간으로 한 형이상학적인 이데아 추구에 주어진다. 전자의 경우는 외부를 향한 따뜻한 가슴 열기의 길 나서기라면, 후자는 내면을 향한 자기성찰과 구도에의 길 나서기라 할 수 있다.
자연풍경 속으로 스며들 때 시인의 감성은 발랄한 언어감각을 동반하면서 대상을 따스한 풍경으로 재구성해 보이는가 하면, 자연현상이나 그 풍경의 분위기에 민감한 촉수를 곤두세우는 서정적 자아가 아름다운 결과 무늬들을 빚는다. 봄날 길에서 만난 모자母子의 벚꽃 구경 장면과 조우하면서 쓴 것으로 보이는 「벚꽃, 옷을 벗다」는 그 한 예다.
어머니가 “버-꼬옷, 버-꼬옷” 하자 아이가 “벗고-옷, 벗고-옷”이라고 따라하다가 마침내 옷을 벗는다든가, 그 어머니도 아이와 벚꽃 눈길 걸어가다 눈부셔 자꾸만 “벗고-옷, 벗고-옷”하게 되고, 아이의 머리 위로 나비처럼 날아 앉는 벚꽃들이 옷을 벗는다고 느끼고 있어 긴장된 언어유희를 통한 발랄한 언어감각과 그런 감각이 빚은 풍경을 밝고 경쾌하게 착색하는 서정적 자아가 돋보인다.
허니문 숙소로 들어선다, 아
카시아 꿀 쫄쫄 빨아먹는 벌 한 마리
눈 깜짝 할 사이
내 콧등 콕 쏘고 날아간다
흠뻑 취한 아카시아 꽃향기
샘내다 들켜버린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 꾹 다물고
하얀 드레스 입은 신부 치맛자락 속에서
밀월여행 즐기는 꿀벌들을 바라보며
침만 꿀꺽꿀꺽 삼킨다
—「밀월여행」 부분
젖은 감성과 발랄한 감각이 두드러져 보이는 이 시 역시 같은 궤의 작품으로 읽힌다. 밀월여행가서 아카시아 꿀을 먹은 벌이 콧등을 쏜 뒤 신부 치맛자락에서 밀월여행 즐기는 광경을 바라보며 꿀 먹은 벙어리처럼 침을 삼킨다는 발상은 참신하고 재미있다.
소주를 바른 새우깡을 갈매기들에게 던져주고는 “술 취한 갈매기가 파도처럼 울렁거리며 / 나랑 자꾸 건배하잖다”며 “꼬랑지 살랑살랑 흔들어대는 새우 앞에서 / 사족을 못 쓰는 부산 갈매기 / 뱃속엔 새우 알만 가득 슬겠다 / 봄나들이 온 동백꽃 아가씨 얼굴을 붉힌다”고 그린 「동백섬」과 「달팽이 뒷간」도 뉘앙스는 다르지만 미묘한 뉘앙스를 빚으며 시 읽는 재미를 한껏 돋우어 준다. 특히「달팽이 뒷간」에서 시인은 지붕도 없이 달팽이처럼 생긴 병산서원 울타리 밖의 머슴화장실에서 대변보면서 “흠, 인기척 소리 내며 / 머슴살이 잠시나마 해볼 일”이라거나 그 화장실을 “한평생 머슴 노릇하고 있는 / 달팽이 한 마리”라고 표현하는 해학과 재치는 순전히 그만의 몫이라 할 만하다.
한편, 시인의 서정적 자아가 내부로 향했을 때는 형이상학적인 이데아 추구나 구도의 길을 찾아 나아가는 행보가 뚜렷해지며, 그런 길 나서기에서 만난 한 그루의 나무마저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도동서원 은행나무」에서 시인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과 겹쳐서 그곳의 은행나무를 우러러보면서 “누명 뒤집어쓴 채 아직도 혁명을 꿈꾸고 서 있”으며 “물길 거스르는 강 속으로 뛰어드는 / 한 그루 거목의 그림자”라고 한훤당을 흠모해 마지않는 건 자신의 ‘마음의 그림’을 그렇게 그려 보이는 것에 다름 아니다.
「연등」에서는 지난 가을에 은행 열매가 매달렸던 자리에 연등들이 매달린 걸 “ 등(나무 등 또는 남의 등)에 분홍색 녹색 연꽃이 피었다”고 읽는다. 또 “그 법당(은행나무가지)에서 / 등 공양 인연 한 번이라도 지었으면 / 수 겁의 천생연분이겠다”고 그 그윽한 곳으로 마음 가져가고, 연등과 함께 매달려 있는 이파리들을 동자승童子僧 눈망울 같다고도 묘사하고 있다. 이 같은 불교적 사유(연기설緣起說 탐구)들은 시인이 부단히 불성佛性을 지향하는 마음자리의 반영으로 보인다. 연등을 달고 있는 나무와 연등들을 부처님에게 돌아가 의지하는 나무南無의 화신이요, 법신法身이라고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시인의 이런 형이상학적인 길 찾기와 그 마음의 여유는 더 나아가 어떤 부처가 “연등 행렬 꽁무니 / 흰 지팡이 짚은 노보살 등에다 / 부적 같은 / 천 원짜리 종이 돈 한 장 / 풍등처럼 달아놓고 갔다”는 익살을 동반하기도 한다. 부적 같고 풍등같이 노보살의 등 뒤에 매달린 지폐 한 장의 의미는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일이다. 돈독한 불심佛心을 거느리는 시인의 이 같은 시선은 하루가 전생인 ‘하루살이’에게도 “내생이 내일보다 더 가깝다”는 윤회설輪回說을 받들면서 “그곳에 / 텅 빈 내가 숨어 있”기 때문에 기적 같은 찰나라도 허투루 얕보지 말라고도 경고한다.
눈먼 스님의 손을 잡고 버스정류소 의자에 나란히 걸터앉아서도 화자는 불교적 사유에 뿌리를 둔 형이상학적인 물음(선禪문답)을 새로운 화두話頭를 던지듯 펴 보인다.
바랑 속에 숨은 봄이 말 걸었다
나는 봄을 찾고 있는 중이요
잃어버린 지 오래된 나의 봄을 찾고 있는 중이요
술래가 된 나는
말 한 마디 꺼내지 못한 채
두리봉 터널 쪽으로 가는
108번 버스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숨바꼭질」 부분
버스를 멍하니 바라봐야 하는 세속도시에서의 이 선문답은 수도암 법당에 들어서면서 한 차원 더 높은 데로 번지기도 한다.
욕심 한 덩어리 푹 도려내 부처님 드리고
참다운 공양구인 양 두 손 척 벌린다
그러면 부처님은
어물쩍 숨겨버린 내 욕심
마저 손바닥에다 올려놓고
되돌려줄듯 말듯 빙시레 웃으신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그러신다
사람들 버리고 간 욕심 다 주워 담아
혼자 꿀꺽 삼켜버리는 부처님
—「진오 대선사」 부분
1992년 비슬산 유가사 수도암에서 입적한 뒤 진신사리가 1백여 과나 나왔다는 비구니계 큰 선승 진오眞悟 대선사의 득도의 세계를 기리는 이 시는 인간은 어느 누구도 ‘부처님 손바닥 안’이며, 사람들이 아무리 욕망이나 욕심을 숨기려야 숨길 수 없다는 깨침을 “사람들 버리고 간 욕심 다 주워 모아 / 혼자 꿀꺽 삼켜 버리는 부처님”이라는 역설을 통해 능청스럽게 떠올린다.
「법거량」에서는 한술 더 뜬다. 화자가 절집으로 가는 길목에 고욤을 주렁주렁 달고 서 있는 고욤나무가 염주 알을 목에 걸고 있는 보살이라 합장 삼배하게 된다. 모든 사물들이 선객禪客으로 둔갑해 선문답을 주고받는 건 시인의 마음눈에 그렇기 보이기 때문이며, 시인이 바로 그런 마음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임도 물론이다. 그 다음은 그야말로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고욤 한 알 한 알 주워 먹다
텅 빈 고요 다 삼킨 고욤 따먹고 싶어
나뭇가지 가까스로 손닿는 중,
포행하고 돌아가던 스님 한 분
내 손가락 훔쳐보며
누구요? 하고 소리치는 중,
묵언정진하던 고요
문풍지처럼 바르르 떤다
탁발 나온 고양이 한 마리
두 눈에 불 켜고
저녁 공양 중인 부처님
밥상머리 꿇어앉아
어느 중의 마음
참마음이요
묻는 중
—「법거량」 부분
이 쯤 되면, 누가 깨침을 얻었는지 아닌지를 부처가 점검하는지 화자가 그러는지, 고양이가 그러는지도 아리송해지기까지 한다. ‘묵언정진’은 ‘고요’의 몫이고, ‘텅 빈 고요’를 다 삼킨 게 ‘고욤’이요 ‘염주 알“이며, 그걸 따먹으려 하는 ’화자(시인)‘에게 포행하고 돌아가다 호통 치는 ’스님‘ 소리에 ’고요‘가 문풍지처럼 떤다. 또 이어지는 장면은 눈에 불을 켜고 탁발하러 나온 ’고양이‘가 저녁 공양 중인 ’부처님‘ 밥상머리에 꿇어앉아 ”어느 중의 마음 / 참마음이요“라고 묻는 중이라니 그야말로 의두疑頭 같은 선문답이요, 법거량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은 ‘마음의 길 찾기’도 특유의 언어유희로 재담을 펴면서도 궁극적으로는 형이상학적인 이데아 추구에 무게를 싣는 시적 묘미를 능란하게 보여준다. 「전하라」는 비슬산 도성암에서 수행정진하다 입적한 도성 대사를 “나무로 되살아 편히 쉬고 계시네”라고 운을 떼면서 그 무릎 아래서 공손히 법문 청하면 “이백오십 살은 족히 된 나무 한 그루 / 나마저 다 뭉그러뜨리고 / 이 몸은 무라, 무라 / 나, 무라 하시네”라고 ‘나’와 ‘무’를 붙였다 뗐다하면서 ‘몸(육신)’과 ’무無’(무상, 허무)를 아우르기도 한다.
또한 하안거 뒤 이 세상에서 수행하고 거주할 곳을 잃게 된 ‘조실 스님’(도성 대사)도 “나무 옷 걸쳐 입고 / 도로 나무로 돌아가셨네 / 도로 나무아미타불 / 전하라 하셨네”라고 읊고 있다. 이 다분히 해학적인 어법과 언어행진은 유희 같기도 하지만, 기실은 ‘나무(木)’와 ‘나무南無’의 발음을 통해 도성 대사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아미타불阿彌陀佛에 귀의, 극락세계 왕생의 염원을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
시인은 ‘마음의 길 찾기’도 특유의 언어유희로 재담才談을 펴면서도 궁극적으로는 형이상학적인 이데아 추구에 무게를 싣는 시적 묘미를 능란하게 보여준다. 신심이 깊은 불자로서의 시인은 불도佛道 수행과 시에의 길을 수행승의 지팡이와도 같은 ‘구도에의 물음’을 짚으면서 가 닿고 싶은 이데아를 향해 언어연금술과 더불어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등 돌리고 앉은 도반
여럿 궁리 끝에
앞서가는 등이 뒤따라오는 등 업고
S자 걸음으로 등을 오른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뗄 적마다
혹 불룩불룩 튀어나온다
나무가 묻는다
저 혹은 누구의 혹이요?
풀리지 않는 의혹
주장자 삼아 짚고
등성이 한 구비 한 구비 오르는 등
나무는 다시 묻는다
저 등을 업고 가는 등은
아등이요?
무영등이요?
—「나무, 의두疑頭」 전문
마지막으로 인용하는 이 시가 시사해 주듯이, 불도 수행의 길도 시에의 길도 이를 지향하는 벗과 함께 ‘앞서가는 등(벗)’이 ‘뒤따라오는 등’을 업고 그 오르막길(산등)을 구불구불 올라야 하고, 끊임없는 물음(혹, 의혹)과 마주치면서 그 의두들을 하나씩 풀어나가야 하는 길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홀로이지만 나무南無가 화두를 잇달아 던져지듯, ‘저 등을 업고 가는 등’이 자신을 포함한 이편의 여러 사람들(아등我等)인지, 아예 그야말로 아등바등인지, 그보다는 훨씬 그윽하게 목표물에 그림자가 나타나지 않도록 조명해 주는 무영등無影燈인지, 그런 의두를 수행승의 지팡이처럼 짚으며 가는 모습이 김욱진 시인의 초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이번 시집의 시에 대해 시인은 “내가 쓴 게 아니라 나라는 놈들의 말을 요리조리 받아 적은 시편들”이라고 했다. “이제 나는 누구인가를 찾기 위해 사소한, 사소하지 않은 물음들을 화두처럼 둘러메고 시라는 산의 능선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중”이라고도 밝혔다. 앞의 말은 다양한 사유와 그 폭을 역설적으로 시사하며, 그 다음 발언은 자기탐구와 성찰을 사소한 것에서 그 차원을 넘어서는 데까지 아우르면서 새로운 시의 산정을 향해 성실하게 나아가겠다는 결의로 읽힌다.
‘나-사회-종교(불교)’ 문제에 천착하는 화두(의두)를 두루 넘나들면서 궁극적으로는 ‘나는 누구인가’를 부단히 찾고 있는 김욱진의 이번 세 번째 시집은 시인 특유의 깊은 통찰력과 상상력으로 우려낸 ‘참, 조용한 혁명’이 아닐 수 없다. 괄목할만한 정진과 진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각별한 마음으로 축하해 마지않으며, 벌써부터 다음 시집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기다려지게 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