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의자 외 6편
백우선
한 생을 우뚝 서서 하늘만 우러르다가
수만 잎의 손과 얼굴로 하늘 향해 반짝이며 환호하다가
낮고 낮아져 이제는 또 한 생
몸의 뼈만으로
말의 뼈무늬만으로
더 높은 하늘
사람을 받습니다.
하늘을 낳으며
목숨들 아래 거름을 뿌리는
사람의 둔부를 받습니다.
큰북
천명을 다한 뒤거나
병을 함께 앓다 생을 끝낸
가죽소는 달린다.
법고로 다시 서서
길이란 길을
노닐며 춤추며 달려간다.
시냇물이나 소낙비의
노래와 신명 가락으로
흘러가며 손들을 잡는다.
만나는 목숨마다
그의 심장 박동으로
둥둥거린다.
어머니의 잡풀
어머니, 무덤의 풀이 무성하네요
잡풀의 키가 허리를 넘어요
발로 젖혀 밟아도 다시 일어서고요
돌아가신 지 열다섯 해, 살과 뼈는 삭아도
저희 근심은 더 푸르게 자라나나요
꽃도 없이 풀들만 숲을 이뤘네요
한여름 빗발 후둑이는 해질 무렵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산기슭
이 칼잎의 풀은 제 것이지요
이 가시넝쿨도 제 것이고요
냇물에 돌이 솟아
저 자식을 어쩌지 못해
불쑥불쑥 솟구치는 저 자식을
차마 어쩌지 못해
그래도 그래도
어르고 달래고 감싸고
뱅뱅 맴돌아
찰랑이며 토닥인다
그래 가자
그래 가자 흐르며
애간장을 끓인다
뒤얽히고 뒤얽히는 심신
겹겹, 겹겹의 주름
저 자식
불쑥불쑥 솟구치는 저 자식을
차마 어쩌지 못해
물거울로 훌훌 흐르지 못해
나를 김장한다
나는 나를 김장한다.
내 몸에 김치와 새 재료를 더 넣어 다시 김장한다.
젓갈을 넣어 맛깔스런 전라도식 배추김치.
무김치, 갓김치, 고들빼기김치와 백김치를
날마다 끼니마다 다시 김장한다.
내 살과 피와 찰떡궁합이 되어
발효, 숙성된 김치는
수시로 남에게 제공된다.
김치눈빛, 김치말씨, 김치몸짓, 김치향으로
사람들의 미감에 척척 감긴다.
명품은 멸치젓을 넣어 감칠맛 나되
너무 짜거나 맵지 않은 배추김치이다.
찹쌀풀, 청각도 들어간다.
미리 주문만 하면
맞춤 김치가 되어 바로 달려갈 수도 있다.
자장면
사무실 구석에 밀쳐둔 자장면 그릇
자장에 비벼져 거멓게 엉겨 붙은 먹다 남긴 면발은
따뜻한 눈길의 밥으로 가는 어둠의 골목길이다.
헐떡이며 뛰어야만 하는 비탈길이다.
질척이는 진흙탕길이고
뒤얽힌 길과 길의 미궁이며
빨려만 드는 시궁늪의 길이다.
바닥 모를 벼랑의 길,
높이 매달려 미끌미끌 흔들리는 길이다.
돌아가거나 고를 수도 없는 외줄의 길이다.
움켜잡은 사람
몇 백 년이 지나 파헤쳐진 무덤 속
사람이 저토록 끝까지 몸을 붙들고 있다.
뼈로 살을, 살로 뼈를 움켜잡고 있다.
꼴이 말이 아닌 도깨비꼴이지만
그래도 놓지 못해 사람 몸을 붙잡고 있다.
손으로 움켜쥔 것은 손금 몇 줄
머리칼로 싸 받친 것은 텅 빈 뇌 껍데기
꿈도 다 잃고 돌바닥에 말라붙어
놓친 끼니의 헛허기나 이빨로 악문 채
미라로 남아서도 결코 사람을 못 놓고 있다.
- 시집 『봄의 프로펠러』2010.문학의전당
* 백우선 : 1953년 전남 광양 출생. 1981년 『현대시학』으로 시, 1985년 『한국일보』신춘문예에 동시로 등단. 시집으로 <우리는 하루를 해처럼은 넘을 수가 없나><춤추는 시><길에 핀 꽃> <봄비는 옆으로 내린다> <미술관에서 사랑하기>, 동시집으로 <느낌표 내 몸>이 있음. 제9회 '오늘의 동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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