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김기림
나의 소년 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 빛에 호젓 때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주 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다녀갔다.
까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 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김기림의 시가 너무 좋다. 김기림은 1908년에 태어나 윤동주와 같은 시대를 살았고 납북되어 사라졌다. 이데올로기와 펄떡이는 서정성 사이에서 그는 고뇌했나 보다. 하지만 그는 치열했던 것 같다. 그랬으니 되었고 여기에 이데올로기에 가려진 그의 은빛이거나 어두운 풍경이 남아있다. 그는 일곱살에 '은빛 바다가 보이는 언덕길'에서 어머니를 잃었고 열여덞살에 각시를 떠나 보냈다. 김기림의 마음은 그 길에 머물러 있었나 보다. 언제나 어머니가, 계집아이가 돌아오기를, 그들과 함께 엮었거나 엮어갔을 이야기가 그리웠나 보다. 하지만 까마귀도, 두루미도 날아가고 어두운 마음만 남아 몸서리쳤다 보다. 나도 돌아오지 않는, 저 한 편에 있는 이야기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내가 보인다. 기다림이면 어떠랴. 모든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언덕길에 은빛 바다와 강이 있는 것을, 그 언덕에 내가 가서 서 있는 것을. 그 뿐이면 어떠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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