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령*에 눕다
이기철
여기 와 미루었던 답신을 쓰네
아무에게도 애린 보내지 않고 살리라 했던 마음
실꾸리처럼 풀려 잡은 펜 자꾸만 홍역을 앓네
잠자리 마른 발이 밟고 간 하늘을 바라며
자꾸 빗금 진 자네 눈썹을 떠올리네
말을 갖지 않은 뫼꽃들은 나를 보고
어서 시집가고 싶다고 말하는 게 틀림없네
내가 벌이 되지 못하니 어찌 저 꽃에게 장가들 수 있는가
늦었는가? 여기 와서 멀어진 한 도시에
나 혼자 보관해 둔 사랑을 꺼내 읽네
자네의 미간 아래쪽으론 자동차 바퀴들이
제 살갗을 조금씩 버리며 달려갈 것이네
무사하지 않은 사람들이 무사한 표정으로 수저를 드는 그곳에도
벌(罰)처럼 가을이 와 조금씩 전염될 것이네
나는 시 한 줄로 세상을 요약해 보이고 싶지만
세상은 일만 페이지의 글줄에도 저 자신을 담지 않네
이른가? 도시는 명랑하고 저녁은 글썽거린다고 나는 쓰네
상처 속의 길은 멀어 언제나 처음부터 헛디디는 것이네
아무도 노랑나비와 할미새와 말벌에 대해 말하지 않을 때
나는 이슬비 대신 금발 햇살과 꽃들의 십자수와
말매미의 음반에 대해 말하려 하네
괜찮은가? 저 계곡물의 백 개의 입에 대해 다 말했으니
이만 펜을 놓네, 무사만 해서야 되겠는가
늘 두근거리는 죄책으로 하루를 물들이게
* 노령―노령산맥(蘆嶺山脈).
『유심』(201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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