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 없는 것처럼
박금선
그날 돌아보니 대하들의 화형식이었다
몇 마리인지 세어보지도 못하고
저울에 올려 무게로 값을 치르고
살아서 펄펄 뛰고 있는
대하의 상품성을 확인하기 급급했다
지느러미도 삐죽삐죽 신선한 것을
벌겋게 달아오른 불길 속으로
한꺼번에 밀어 넣었다
뚜껑을 닫은 팬 속에서 이리저리 뒤엉켜
튀어 오르는 장면도
발버둥치는 구원의 소리도 외면하고
여럿이 둘러앉아
수다를 떨며 구이가 되길 기다렸다
그것들이 지글지글 익을 때까지
분위기가 막 달아오를 때 까지
그렇게 많은 대하들의 주검을
바라보았다
눈물 한 방울 없이
지옥의 문지기처럼 앉아있었다
죽어 빨갛게 꽃이 된 대하
껍질을 벗기고
악마처럼 그 뜨거운 몸을 우리는
허겁지겁 먹었다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그날 밤 꿈속에서
대하들이 슬프게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시집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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