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모 일기
김욱진
청춘에 혼자되어 딴눈 한번 팔지 않고
평생을 쪼그리고 앉아 밭뙈기만 일구며 살아오신 구순 노모
무릎 관절 닳고 닳아 오금조차 뗄 수 없다는 말씀을 듣고서야
생전 타보지 못한 으라차차 한 대 불쑥 사서 보내드렸더니
이 나에 꼬맹이 타는 유모차를 어떻게 끌고 다니냐며
아랫목에 그냥 고이 모셔두고는
장날마다 가서 사온 알록달록한 옷가지들만 수북 태워놓으셨다
어여차 어여차 어기여차 꽃상여 밀고 당기듯
두 무릎 버티고 일어서는 모습 안쓰러워
의자 앉아 볼일 보는 실내변기도 하나 장만해드렸더니
아까워서 못쓰겠다며 윗목에 고대로 놔두셨다
그러고 동네 노인정 가서는
이제 내 차도 한 대 생겼고 똥오줌도 방안에서 다 본다며
여차저차 자랑자랑 늘어놓으셨단다
그 소문 들은 건넛집 꼬부랑 할머니 어렵사리 찾아와
이참에 문경댁 차 타고 늦가을 단풍 구경이나 한번 하자며
다짜고짜 노모차 질질 끌고 나와
감잎 어지러이 나뒹군 마당 몇 바퀴 끙끙 돌더니
며칠째 보지 못한 똥이 다 마렵다며
방안으로 엉거주춤 걸어 들어와 변기에 덥석 앉아서는
똥은 어딜 가고 용만 죽도록 쓰다 집으로 돌아갔다는데
노모는 그 담날 노모차를 끌고 마을회관까지 와서
차를 타고 다니니 영 수월타며, 그런데
누가 내 똥통 고장 다 내놓고 갔다며
어젯밤엔 참다 참다 못해 노인정 화장실 와서 변을 보고 갔다지 뭔가
(2020 대구문학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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