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작

노모 일기

김욱진 2020. 3. 16. 23:54

노모 일기

 김욱진


청춘에 혼자되어 딴눈 한번 팔지 않고

평생을 쪼그리고 앉아 밭뙈기만 일구며 살아오신 구순 노모

무릎 관절 닳고 닳아 오금조차 뗄 수 없다는 말씀을 듣고서야 

생전 타보지 못한 으라차차 한 대 불쑥 사서 보내드렸더니

이 나에 꼬맹이 타는 유모차를 어떻게 끌고 다니냐며

아랫목에 그냥 고이 모셔두고는

장날마다 가서 사온 알록달록한 옷가지들만 수북 태워놓으셨 

어여차 어여차 어기여차 꽃상여 밀고 당기듯 

두 무릎 버티고 일어서는 모습 안쓰러워 

의자 앉아 볼일 보는 실내변기도 하나 장만해드렸더니

아까워서 못쓰겠다며 윗목에 고대로 놔두셨 

그러고 동네 노인정 가서는

이제 내 차도 한 대 생겼고 똥오줌도 방안에서 다 본다며 

여차저차 자랑자랑 늘어놓으셨단다 

그 소문 들은 건넛집 꼬부랑 할머니 어렵사리 찾아와

이참에 문경댁 차 타고 늦가을 단풍 구경이나 한번 하자며  

다짜고짜 노모차 질질 끌고 나와

감잎 어지러이 나뒹군 마당 몇 바퀴 끙끙 돌더니

며칠째 보지 못한 똥이 다 마렵다

방안으로 엉거주춤 걸어 들어와 변기에 덥석 앉아서는

똥은 어딜 가고 용만 죽도록 쓰다 집으로 돌아갔다는데

노모는 그 담날 노모차를 끌고 마을회관까지 와서

차를 타고 다니니 영 수월타며, 그런데

누가 내 똥통 고장 다 내놓고 갔다며

어젯밤엔 참다 참다 못해 노인정 화장실 와서 변을 보고 갔다지 뭔가


(2020 대구문학 3월호) 


'♧...발표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0) 2020.07.11
수상한 시국-코로나19  (0) 2020.04.10
두레반  (0) 2019.12.06
마음녀석  (0) 2019.09.22
참꽃  (0) 2019.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