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땅 부자다
아버지 살아생전
옆집 다랑논 서너 마지기 붙여먹고 살면서도
나는 땅 부자다, 땅 부자다 늘 그러셨는데
고 말씀 고대로 물려받았다
걷다, 문득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땅, 나는 땅의 아들
땅 부자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땅
나 혼자 걷다 보면
그 땅은 온전히 나의 땅이 되고 만다
이런 날은
오두막 같은 찻집에 들어가
삼천 원짜리 커피 한 잔 시켜놓고
땅 주인 노릇을 한다
여보시오, 이곳은
쓸 땅이 없는 거 같소
그러면, 동남아 종업원 아가씨
설탕 한 봉다리 들고 쫓아와
썰∼땅 쓸 땅 여기 있어요, 하면서
연신 고개를 숙인다
이 맛에 나는
쓸모없는 땅만 죽도록 밟고 다닌다
땅값이 얼마냐고
평수가 얼마나 되냐고
묻는 이 없어 참, 좋다
(시작노트) 아무도 가지 않은 듯한 길 한 모퉁이 조용한 찻집 들렸다.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이곳은 쓸 땅이 없는 거 같소’했더니, 종업원 아가씨가 썰∼땅 쓸 땅 그러면서 설탕을 한 봉지 들고 오지 뭔가. 그 설탕이 내겐 쓸 땅으로 와 닿았다. 그래, 맞아. 여기, 지금, 나는 쓸 땅에 머물고 있어. 이게 바로 설탕이지. 문득 옆집 다랑논 서너 마지기 붙여먹고 살면서도 나는 땅 부자다 땅 부자다, 그러시던 아버지 말씀 떠올랐다. 아버지는 땅, 나는 땅의 아들…고로, 땅 부자다
외도
벌들이 바람났다
비슬산 기슭 양동마을 뒷골
아카시아 꽃향기 맡고 날아온 벌들
허니문 기간이 끝났는지
짝을 잃었는지
우리 집 장독대까지 날아와
엄니 살아생전
설탕 한 봉다리 소주 한 됫병 넣고
담아둔 오디술 맛에 푹 빠져
돌아갈 생각을 않고
처마 밑에다 집을 지었다
그 소문 들은 벌들이 떼로 몰려와
한데 엉겨 붙은 오디입술 쪽쪽 빨아 마시고는
대낮부터 횡설수설하며 윙윙거리다
하룻밤씩 묵어갈 때도 있었다
것도 모르고
건넛마을 혼자 사는 벌통주인 박씨 영감은
술값만 떨어지면 엄니한테 불쑥불쑥 찾아와
진짜 아카시아 꿀이라며
사라고, 사라고 통사정을 했는데
(시작노트) 아카시아 꽃 필 무렵이면, 비슬산 자락은 벌들로 북적인다. 엄니 살아생전 설탕 한 봉다리 소주 한 됫병 넣고 담아둔 오디술에 벌들이 날아들었다. 처마 밑에 집을 짓고 바람피우는 벌들도 있었다. 것도 모르고 건넛마을 벌통주인 영감은 간간이 엄니한테 찾아와 진짜 아카시아 꿀이라며 사라고, 사라고 통사정했으니, 참…
-2022문장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