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 외 11편
정호승
누가 나를 입양하겠다고 한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미 헌옷박스에 버려진 나를
하늘의 호적에 올리고
데려가겠다고 한다
이왕이면 비행기를 타고 갔으면 좋겠다
이번에 나를 입양할 부모는
토성 근처 어느 별에 사는
별지기라고 한다
결빙
결빙의 순간은 뜨겁다
꽝꽝 얼어붙은 겨울 강
도도히 흐르는 강물조차
일생에 한번은
모든 흐름을 멈추고
서로 한몸을 이루는
순간은 뜨겁다
허공
어머니 바느질하시다가
바늘로 허공을 찌른다
피가 난다
어머니 바늘로 허공을 기워
수의를 만드신다
운구하다
첫눈 오는 날
새의 시체를 운구하다
봄눈 오는 날
개미의 시체를 운구하다
함박눈 쏟아지는 날
꽃의 시신을 운구하다
드디어 눈 그친 날
아이들과 함께
쓰러진 눈사람 하나
운구하다
부활
진달래 핀
어느 봄날에
돌멩이 하나 주워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돌멩이가 처음에는
참새 한 마리 가쁜 숨을 쉬듯이
가쁘게 숨을 몰아쉬더니
차차 시간이 지나자 잠이라도 든 듯
고른 숨을 내쉬었다
내가 봄 햇살을 맞으며
엄마 품에 안겨
숨을 쉬듯이
인삼밭을 지나며
내 어찌 인간을 닮고 싶었으랴
내 일찍이 풀의 이름으로 태어나
어찌 인간의 이름을 닮고 싶었으랴
나는 하늘의 풀일 뿐
들풀일 뿐
어찌 인간의 영혼을 지녔으랴
어찌 인간이 되고 싶었으랴
충분한 불행
나는 이미 충분히 불행하다
불행이라도 충분하므로
혹한의 겨울이 찾아오는 동안
많은 것을 잃었지만 모든 것을 잃지 않았다
죽음이란 보고 싶을 때 보지 못하는 것
보지 못하지만 살아갈수록 함께 살아가는 것
더러운 물에 깨끗한 물을 붓지 못하고
깨끗한 물에 더러운 물을 부으며 살아왔지만
나의 눈물은 뜨거운 바퀴가 되어
차가운 겨울 거리를 굴러다닌다
남의 불행에서 위로를 받았던 나의 불행이
이제 남의 불행에게 위로가 되는 시간
밤늦게 시간이 가득 든 검은 가방을 들고
종착역에 내려도
아무데도 전화할 데가 없다
바닥에 쏟은 커피를 바라보며
바닥에 쏟은 커피는 바닥이 잔이다
바닥에 커피를 쏟으면
커피는 순간 검은 구름이 된다
바다가 비에 젖지 않고 비를 바다로 만들듯
바닥도 커피에 젖지 않고 커피를 바닥으로 만든다
바닥을 걷는 흉측한 발들아
물 위를 걸은 예수의 흉내를 내다가 익사한 발들아
검은 구름떼가 흘러가는 바닥의 잔을 들어라
오늘도 바닥의 잔을 높이 들고
남은 인생의 첫날인 오늘보다
남은 인생의 마지막 날인 내일을 생각하며
봄비 내리는 창가를 서성거려라
죄송합니다
아직 숟가락을 들고 있어서 죄송합니다
도대체 뭘 얻어먹을 게 있다고
해는 지는데
숟가락을 들고 하루종일
지하철을 헤매고 다녀서 죄송합니다
살얼음 낀 한강에 떠다니는 청둥오리들
우두커니 바라보아서 죄송합니다
한강대교 위에서 하늘로 힘껏 던진 돌멩이들
별이 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믿음이 없으면서도 그분의 옷자락에 손을 대고
그분의 신발에 입맞추어서 죄송합니다
진주조개를 돌로 내리쳐서
채 만들어지지도 않은 진주를 꺼낸 일도 죄송합니다
겨울비 내리는 서울역 뒷골목
오늘도 흰 구름이 찾아오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언제나 시작도 없이 끝만 있어서 죄송합니다
시계의 잠
누구나 잃어버린 시계 하나쯤 지니고 있을 것이다
누구나 잃어버린 시계를 우연히 다시 찾아
잠든 시계의 잠을 깨울까봐 조용히 밤의 TV를 끈 적이 있을 것이다
시계의 잠 속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을 보고
그 눈물 속에 당신의 고단한 잠을 적셔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동안 나의 시계는 눈 덮인 지구 끝 먼 산맥에서부터 걸어왔다
폭설이 내린 보리밭길과
외등이 깨어진 어두운 골목을 끝없이 지나
술 취한 시인이 방뇨를 하던 인사동 골목길을 사랑하고 돌아왔다
오늘 내 시계의 잠 속에는
아파트 현관 복도에 툭 떨어지는 조간신문 소리가 침묵처럼 들린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너의 폭탄테러에 죽었다가 살아났다
서울역 지하도에서 플라스틱 물병을 베고 잠든
노숙자의 잠도 다시 죽었다 살아나고
내 시계의 잠 속에는 오늘
폭설이 내리는 불국사 새벽종 소리가 들린다
포탈라 궁에서 총에 맞아 쓰러진 젊은 라마승의 선혈 소리가 들린다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리 위를
부지런히 손을 잡고 걸어가는 젊은 애인들이 보인다
스스로 빛나는 눈부신 아침 햇살처럼
내 가슴을 다정히 쓰다듬어주는 실패의 손길들처럼
휴대폰의 죽음
휴대폰의 죽음을 목격한 적이 있다
영등포구청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전동차가 역 구내로 막 들어오는 순간
휴대폰 하나가 갑자기 선로 아래로 뛰어내렸다
전동차를 기다리며 바로 내 앞에서
젊은 여자와 통화하던 바로 그 휴대폰이었다
승객들은 비명을 질렀다
전동차는 급정거했으나 그대로 휴대폰 위로 달려나갔다
한동안 전동차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역무원들이 황급히 달려오고
휴대폰의 시체는 들것에 실려나갔다
한없이 비루해지면 누구의 얼굴이 보이는 것일까
지금 용서하고 지금 사랑하지 못한 것일까
선로에 핏자국이 남아 있었으나
전동차는 다시 승객들을 태우고 비틀비틀 떠나갔다
다시 전원의 붉은 불이 켜지기를 기다리며
휴대폰은 자살한 이들과 함께
천국의 저녁 식탁 위에 놓여 있다
풀잎에게
늙은 아버지의 몸을 씻겨드리는 일은
내 시체를 씻기는 일이다
하루종일 밖에 나가 울고 돌아와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공중목욕탕에 가서
정성껏 씻겨드리는 일은
내 시체의 눈물을 씻기는 일이다
아버지의 몸에 남은 물기를 다 닦아드리고
팬티를 갈아입혀드린 뒤
공손히 손톱을 깎아드리는 일도
내 시체에서 자란 눈물의 손톱을 깎는 일이다
나는 오늘도 하루종일 울고 돌아와
늙은 아버지의 몸을 씻겨드린다
밤의 벌레 뒤를 따라가
풀잎 위에 등불을 달고
내 시체를 눕힌다
- 시집 『밥값』(창비,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