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노루 이야기
-아버지 떠나신 날
1
일천구백칠십삼년 섣달 초하루, 제 키보다 두어 뼘 정도 작은 지게 어른스레 걸머지고 재 너머 고지박이* 하러 간 열다섯 살의 소년, 맞은 편 산등성이서 등걸 줍던 장정들의 고함소리에 길 잃은 궁노루 새끼 한 마리, 겁먹고 달아나다 그만 낯선 올가미에 뒷다리 홀쳐 팔딱거리다 며칠 후 사슴 눈빛 빼닮은 소년의 아버지, 눈 덮인 골 양지녘에 흰 구름 베개 삼아 고이 잠들다 그날 밤 구슬피 울던 새끼노루도, 허기진 초승달도 모두모두 소년의 곁을 떠나고 말다
2
소년의 가슴속 켜켜이 자란 대나무 한 그루, 당신의 봉분 머리맡에서 서걱거리다 쑥부쟁이 구절초 안부 물으며 그토록 오가시던 길섶, 다람쥐 휘파람새 오목눈이도 문상 온 듯 고개 숙이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산기슭 한 모퉁이 당신을 뉘고 돌아설 무렵, 누군가의 넋인 듯 억새풀 사이로 새어나오는 ‘네 어미…’하는 떨림의 목소리 문득 뒤돌아보니 웅크린 굴참나무 아래 눈시울 붉히고 서 있는 늙은 궁노루 한 마리
*고지박이 : 썩은 등걸을 일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