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슬산 사계

해설

김욱진 2010. 5. 21. 19:31

 (해설)

 

 

장소에 대한 사랑과 발보리심發菩提心

           -김욱진 시집《비슬산 사계》

 

                          김상환(문학박사, 한국과정사상연구소 연구원)

 

 

1. 시와 장소

 사십대 후반의 늦깎이로 나온 김욱진 시인과의 만남과 인연은 참으로 소중하고 깊다. 직장 동료이자 문우로 함께 한 지도 이십 년을 족히 넘어서고 보면, 그는 시인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성실한 교육자이자 인격자이며 독실한 불자이다. 가장 가까이서, 오랫동안 그를 지켜 본 나로선 문학에 관한 한 그의 충실한 독자이기도 하다. 사회학도인 그가 애당초 시를 쓴다고 했을 때 약간은 의아해 했지만, 그것은 하나의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문학 혹은 문예창작 전공자 이상의 감각과 정서, 상상적 우주와 삶을 통찰하는 깊이가 있었다. 그런 그가 저간의 시편들을 한데 모아 처녀 시집을 낸다 하니 나의 일처럼 기쁘다. 그는 이제 누구보다 시의 맛에 흠뻑 취해 있다. 아니, 시의 고유한 향기와 빛과 색깔과 소리를 알고 있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모든 예술은 그 본질에 있어 시이다. 그러한 예술적 진리나 진실이 표방하는 직관과 통찰 내지 세계 이해는 다른 누구보다 시인에 의해 주어지는 법이며, 시를 통해 구현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 한 편에 구축된 세계란 과연 무엇인가, 또 그런 세계와 함께 작품이란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 것인가? 하는 바는 보다 근원적인 질문에 속한다. 우리가 허다한 시를 읽고, 또 생의 한 순간을 예의주시하며, 이를 미적 언어로 형상화하는 시작詩作의 일/맛이란 체험해 보지 않고선 발설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그의 이번 시집 출간을 나는 누구보다 반기며, 또 기다려 온 게 사실이다.  

 김욱진 시의 특징은 아무래도 시인이 살고 있는 장소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경북 문경이 고향인 그는 우연히 비슬산 기슭에 둥지를 튼 지 올해로 만 20년이 된다. 그런 시인은 이제 영락없는 비슬산인이다. 유서 깊고 영험한 비슬산의 봄/여름/가을/겨울의 시간과 이야기가 이번 시집의 주된 내용이다. 그는 본래 시에서나 삶에 있어 불교와 인연이 깊다. 비슬毘瑟이란 지명도 산정의 바위 봉우리가 흡사 신선이 지상에 내려앉아 비파를 타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대 인도 힌두의 신인 비슈누Visnu를 한자로 음역한 ?비슬노毘瑟怒?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개인적이고 심오하면서도 유의미한 장소로서 비슬산과의 만남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특정 장소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한 편의 시로 조직하는 그의 방법론은 가시적인 풍경에 대한 예찬이나 발견이 아니라, 어느 모로 실존적 고뇌를 내포하고 있다.?나는 불교 집안에서 태어나/ 행자처럼 불경을 외며/ 부처님 앞에서 백팔 배를 하고/ 더러는 참선도 하며/ 윤회를 철석같이 믿는 불자(〈기도〉)라는 자신의 고백에서도 십분 엿볼 수 있듯이, 비슬산과 인근 자연을 제 집처럼 드나들며, 그곳의 사계四季를 노래하고 자아를 성찰하는 데는 그만의 기쁨과 슬픔이 심연처럼 가로 놓여 있다. 

 

2. 김욱진 시의 주제와 양상

 김욱진의 시적 관심이나 시선은 일차적으로 대개인적인 것에 머물러 있다. 이는 서정시의 특성이자, 여타 시인들에게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본질적인 것이기도 하다. 존재론적 고독이나 자아와 관련한 주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의 시는 젊은 시인들에게서 쉽사리 찾아볼 수 있는 말의 현란함보다는 삶의 밀도와 은근한 맛이 있다.

 

〔1〕

․ 길을 가다/ 돌부리 걸려 넘어지는 날이면/ 홀로 그대 찾아와/ 세상 사는 법 묻고 또 묻고/ 돌아간 적 한두 번이 아니라네 (〈느티나무-비슬산․5〉)

〔2〕

․ 석류 익은 토담집 마당 한구석/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내 그림자 밟고 지나가는 귀뚜리 한 마리 (〈가을 속의 나-비슬산․10〉)

〔3〕

․ 나 홀로 어딘가에 매달려 있다는 느낌(〈자화상〉)

〔4〕

․ 언젠가는 길섶에서 먼지 덮어쓰고/ 저 홀로, 묵묵히 살아가야 함을(〈인생 스케치〉)

〔5〕

․ 저(어린 나무-필자주) 홀로/ 험한 세상 헤치며 사는 것이/ 남의 일 같지 않아(〈인연〉)

〔6〕

․ 그(수도암 은행나무-필자주)도 나처럼 혼자인 것 같아(〈은행나무․2-비슬산․7〉)

 

 등의 예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그의 시작詩作의 근저에는 고독이 깊이 자리해 있다. 이 경우 고독의 정서란 외부 감정의 방해를 받지 않고서도 생성되며, 그것은 인용시에서 내면 심리의 반영〔2,3,4〕으로, 감정 이입의 과정에서 비롯되는 것〔5,6〕으로, 더러는 세상사는 법과 관련한 윤리적/종교적 차원에 기인한 것〔1〕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 있다. 여기서, 특히〔1〕의 경우는 이-푸 투안Yi-Fu Tuan이 말한광대한 느낌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고독을 의미한다. 그의 고독감은 소외나 고립 등과 같은 소극적인 정서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인용시들 중〔1,2,6〕은?비슬산이란 부제가 달려 있으며 산내 암자에서 오래도록 묵언정진해 온 나무들을 그 제목으로 삼고 있는 점만 봐도 그러하다. 그런 만큼, 그의 시에는 불교적/자연적 심성이 크게 자리해 있다. 산문山門, 도반道伴, 법문法門, 무심無心, 선정禪定, 허공虛空 등이 이번 시집에서 빈번하게 노출되는 시어들이고 보면, 김욱진의 첫 시집은 불교적 세계 인식과 상상력이 무엇보다 그 기반이 되고 있다.〈도반道伴〉을 보기로 하자.

 

저녁 공양을 마친 개 한 마리가

방선放禪하듯 절집 마당을 빙빙 돌고 있다

너덕너덕 기운 옷을 걸친 노스님이

혓바닥 길게 내민 견공의 목줄을 잡고

묵정밭을 매듯 무심히 따라 돌고 있다

연못 속에 우두커니 물구나무선

내 가랑이 새로 길을 낸 물고기들이

바깥세상을 환히 들여다보고 있다

법당 앞 반석 위에 쪼그리고 앉은

밤 고양이의 눈빛 휘돌아나가는

보름달처럼

-〈도반道伴-비슬산․3〉전문

 

 이 시가 보여주는 것은 저녁 무렵 어느 절집 마당의 풍경이다. 공양을 마친 노승과 함께 방선放禪을 하고 있는 개는 더 이상 천한 미물이 아니라 한 스님의 도반으로 설정되어 있다. 개는 생명의 목줄을 저당 잡힌 상태 하에서 혓바닥(을) 길게 내민 채 묵정밭을 매는 시늉을 하면서도 부담스러워 하기는커녕 오히려 무심無心을 유지하고 있다. 이를 두고 어찌 뭇짐승을 짐승이라 부르랴. 문제는 대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남다른 시각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를 하나로 인식하는 불교적 사유 즉, 불이不二의 세계에서 그는 구도의 길을 찾고 있다. 뿐 아니라, 표현 기법의 차원에서도 이 시는 주목할 만하다. 물고기와 (밤)고양이의 형상이 흡사 목어나 목탁을 연상케 한다. 깨어있는 정신의 표상으로서의 물고기는 안/밖을 환히 들여다보는 절대적 존재로, 법당 앞 반석 위에 목탁처럼 앉아 있는 고양이 눈빛/마음 속을 지나 보름달에 이른다. 물고기-고양이-보름달로 치밀하게 환치시킨 시상의 상관성을 가만 들여다보면, 시인의 윤회의식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또한 노승의 도반으로 설정되어 있는 개와 물고기, 고양이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동적인 데 있다. 참선 혹은 방선放禪이란 것도 기실은 정적이면서도 내부적으로는 다이내믹dynamic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그의 도반의식은 동물은 물론, 식물(전생의 도반道伴 같은/ 가랑잎 하나 벗하며〈인생 스케치〉)이나 자연 현상(풍경 소리/ 한 바랑 걸머지고/ 저녁노을/ 도반道伴 삼아?〈선방禪房에서-비슬산․4〉)에 이르기까지 전반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예의 시적 사유와 상상력은 시집 도처에 미만해 있으며, 아래와 같이 더욱 다양하고 새롭게 제시되기도 한다.

 

〔1〕

멀리 동녘 바다 햇살/ 한 바랑 담아와/ 산문山門 활짝 열고/ 새벽 예불하던 산새 한 마리/ 바위 틈새 쪼그리고 앉은/ 내 마음 몇 모금 물고/ 휜 산허리 접어 오를 제,/ 어디선가 무심히 스며드는/ 산사의 종소리/ 그 여음餘音 사이로/ 물안개 피어오르고/ 어느 새/ 날갯죽지 흠뻑 젖은/ 비슬琵瑟의 산 돌부처/ 반야반야심경심경/ 눈뜬 골골마다 걸터앉아/ 때 묻은 허공비늘/ 햇살에 버무려 빗질하네.

-〈도성암 가는 길․1-비슬산․1〉전문

〔2〕

떠돌다, 또/ 날이 저문다// 의뭉스러운 겹거미 한 마리가/ 허공에 집을 짓는다// 석류 입술에 살몃 기댄/ 햇살 몇 줌 주워 기둥 세우고/ 수런거리는 갈바람의 그늘 아래/ 한가로이 걸터앉아// 투기꾼마저 눈치 채지 못한 그곳에/ 얼기설기 줄을 친다// 어디선가 날아온/ 고추잠자리 서너 마리가/ 하룻밤 묵어갈 요량이다// 처마 밑으로/ 찬바람이 분다

-〈거미〉전문

〔3〕

나뭇가지가 연신/ 초승달 어깨를 후려친다// 삼보일배 하는/ 낙엽들의 행렬이 장엄하다// 탁발 나선 갈바람의/ 바랑 속으로// 바르르 떨고 있는/ 밤하늘의 별들마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가을 죽비〉전문

〔4〕

연잎에 기댄 개구리들이/ 가랑이 새로 초승달을 낳는다/ 와글와글 야단법석이다/ 천지간 탯줄 끊어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목마른 영혼들을 어루만지는/ 염불소리 같기도 하다/ (…) 어디선가 모여든 운수납자들이/ 저마다 익힌 몸짓으로 선문답을 한다/ (…) 전생의 훈습이 되살아난 듯/ 밤 이슥토록 묵묵부답이다/ 누가, 보름달을 보았나

-〈유등연지에서〉일부

 

 데뷔작이기도 한〔1〕의 경우, 허공에는 천상의 새가 날고 지상엔 산사의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소리의 울림으로 물안개는 꽃봉오리처럼 피어나고, 오래된 암자의 돌부처는 안개에 젖어 경전을 독송한다. 그야말로 때 묻은 속세가 정화되는 순간이다. 유서 깊은 비슬산 도성암 가는 길에서 시인은 이처럼 윤회(새->종소리->안개->부처)의 상상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시각과 청각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배합하여 시의 새로움을 더하고 있으며, 게다가 촉각적(스며드는) 심상마저 보태어져 더욱 그러하다. 이에 반해〔2〕의 경우는 거미와 고추잠자리의 관계를 통해 인간 삶의 함정과 아이러니irony를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의뭉한 거미가 쳐놓은 줄에 비록 고의는 아니더라도 애꿎은 고추잠자리가 떼로 걸려들고 마는(하룻밤 묵어갈 요량) 형국을 말한다. 여기서 시인은 먹이사슬처럼 뒤얽힌 모든 생명체들의 관계를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인식하고 있는 바, 불교의 인연법 원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서두 부분(떠돌다, 또/ 날이 저문다)에서 강한 인상을 받게 되는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악연을 포함한) 인연으로 얽히고설킨 관계와, 허공의 집짓기?라는 거미의 생존 방식이 불가에서 말하는 삶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시인의 이러한 인연법 내지 윤회 의식은 또 다른 시편(저마다 뿌리내린 사계四季의 무늬가/ 둘이 아닌 하나로,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덧없이 얽혀 있음을 절감하며?〈인생 스케치〉)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한편, 3〕의 경우는 인간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절대정신을?죽비?라는 상징물로 구체화하고 있다. 불교에서 죽비는 부처와 중생을 이어주는 매개적 기능을 한다. 가을이라는 추상적 시간과?죽비?라는 구체적 사물의 조화는 불교적 생활태도의 습이 이미 깊숙이 자리해 있는 김욱진이 아니고선 이끌어내기 어려운 시제詩題이자 시의 내용이다. 계절로 말하면 여름과 달리 가을은 문학적 시간이자 몽상의 시간에 속한다. 시인이 사계四季 중 가을에 가장 천착하고 있는 점도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태어나 살다가 생을 마감하기 직전의 절박한 순간에도 참회하고 기도하는 가을 낙엽의 발걸음(나뭇가지가~장엄하다)에 묵연히 따라나선 시인은, 탁발 나선 갈바람의 바랑 속에서 현실의 고통과 갈등을(가을) 죽비소리로 받아들이며 이를 승화시키고 있다.〔4〕에 있어서는 초승달 뜬 유등연지의 풍광이 그림처럼 선명하며, 자연과 불교적 상상력이 빈틈없이 짜여진 우주의 인과 논리를 함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어디선가 선객처럼 모여든〈능구렁이-고양이-청둥오리-반딧불이-두꺼비〉등은 시인의 전생 도반들로서, 밤늦도록 무언의 선문답을 하며 서로 “누가, 보름달을 보았나” 라고 묻고 있다. 선가禪家에서 보름달은 깨침의 경지를 의미한다. 연잎 (위)에 탯줄 끊어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뭇) 영혼을 위무하는 염불소리 같기도?한 개구리 울음소리가 하나의 실루엣처럼 처리되어 있는 이 시에서, 초승달 뜬 밤의 개구리 울음소리가 야단법석을 피울지라도, 우리는 오히려 더한 고요와 진리의 보름달을 보게 된다. 모든 생명체에 대한 시인의 이러한 도반의식은 환경파괴나 개인주의로 치닫는 오늘날 현대사회를 일깨워주는 조용한 외침이다. 그리고?(연꽃이 핀) 못의 이미지는 인간의 내면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만하다. 그의 불교적 인식과 관련한 이상의 작품들은 거개가 비슬산이라는 장소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 장소에 대한 아름다움과 사랑은 비슬산의 사계를 노래한〈비슬산 사계-비슬산․11〉에 더욱 잘 나타나 있다.

 산이란 산은 나이가 들수록 맑고 향기롭다/ (…) 산비탈 굽이굽이 돌아올라 발길 머문 텅 빈 대견사지, 주춧돌 언저리 흩어져 앉은 스님바위들은 아직도 묵언정진 중이다 천년의 넋을 달래며 탑돌이하는 갈바람의 발걸음만 분주하다 허연 가사장삼 걸치고 무심히 법문하는 억새풀 머리맡으로 새털구름 지나간다/ (…) 달빛 어린 비슬산/ 등성이마다/ 거문고 줄 잡아당기는/ 한갓진 물소리 바람소리 솔방울 웃음소리

-〈비슬산 사계-비슬산․11〉일부

 

 이렇듯 그가 산이란 산을 가까이 하는 데는 범속한 사람과 달리 산은 세월이 흘렀어도, 아니 흐를수록 맑고 향기롭다는 데 있다. 이는 그의 인간됨을 말하기도 하고, 깨달음의 지혜와 그 보리심菩提心을 구하는 영혼에게만 허락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산이란 산 가운데서도 그가 특히 비슬산을 애지중지하는 데는 그곳의 바위가 스님을 빼어 닮고, 또 사계를 두고 온갖 동식물들이 제 목소리를 내며, 그들을 제 품에 살게 하는 데 있다. 특히 달빛 어린 비슬산의 아름다움이란 거문고 가락이 등성이마다 울려 퍼져 그야말로 절창이다. 어두운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이는 자연과 생명의 활력이 차고 넘치는 시다. 그런가 하면, 아래의 경우는 비록 양상은 다르지만, 김욱진의 또 다른 내면을 엿볼 수 있는 시편이기도 하다. 기억 속의 아버지가 바로 그것이다.

1

일천구백칠십삼년 섣달 초하루, 제 키보다 두어 뼘 정도 작은 지게 어른스레 걸머지고/ 재 너머 고지박이 하러간 열다섯 살의 소년, 맞은 편 산등성이서 등걸 줍던/ 장정들의 고함소리에 길 잃은 궁노루 새끼 한 마리, 겁먹고 달아나다 그만 낯선/ 올가미에 뒷다리 홀쳐 팔딱거리다 며칠 후 사슴 눈빛 빼닮은 소년의 아버지, 눈/ 덮인 골 양지녘에 흰 구름 베개 삼아 고이 잠들다 그날 밤 구슬피 울던 새끼노루도,/ 허기진 초승달도 모두모두 소년의 곁을 떠나고 말다

2

소년의 가슴속 켜켜이 자란 대나무 한 그루, 당신의 봉분 머리맡에서 서걱거리다/ 쑥부쟁이 구절초 안부 물으며 그토록 오가시던 길섶, 다람쥐 휘파람새 오목눈이도/ 문상 온 듯 고개 숙이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산기슭 한 모퉁이 당신을 뉘고 돌아설/ 무렵, 누군가의 넋인 듯 억새풀 사이로 새어나오는 ‘네 어미…’하는 떨림의 목소리/ 문득 뒤돌아보니 웅크린 굴참나무 아래 눈시울 붉히고 서 있는 늙은 궁노루 한 마리

-〈궁노루 이야기-아버지 떠나신 날〉전문

 

 마르셀 프루스트에 의하면, 실재reality란 오직 기억 속에서만 만들어지는 법이다. 열다섯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소년은 그 때의 생생한 기억이 하나의 트라우마(trauma, 정신적 상흔)로 남아 시의 모티프로 작용하고 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살수록 짠해 오는(〈가난한 날의 잔상殘像․1〉)것은 성장해서가 아니라, 아직은 형성기에 놓여 있는 청소년기에서 비롯된 때문이다. 그런 소년의 맑은 감성은 농부의 초라한 모습임에도 사슴 눈빛(을) 빼닮은?아버지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죽음을 예감하는 궁노루-사향노루의 이미지는「비목」이란 노랫말(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비목이여) 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맑고 깨끗한 눈빛보다는 웅크린 굴참나무 아래 눈시울(을) 붉히고 서 있는 늙은 궁노루로 제시되어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날 밤, 새끼노루도 구슬피 울고, 허기진 초승달도 모두모두 (어린) 소년의 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소년으로선 둘도 없는 아버지의 죽음을 조상하기 위해 미물들(다람쥐/휘파람새/오목눈이)마저 자리를 같이 한 셈이다. 그러한 데는 다시 오지 못하는 아버지에 대한 슬픔도 슬픔이지만, 상주인 어린 소년과 그 어미에 대한 안타까움이 미물들로 하여금 발걸음을 옮기게 했을 터. 이처럼 서정시에 있어 아름다움은 언제나 슬픔을 수반한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이 갖는 주제가 그러하듯, 인간이 우주의 질서와 확실하게 접촉할 수 있는 것은 시간과 고통, 그리고 예의 죽음을 통해서이다. 미루어 짐작컨대, 그가 일찍부터 이러한 가족의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자연스레 종교(불교)에 마음을 쏟게 되고, 시작詩作에 한 걸음 더 다가섰을 게 아닌가 한다.

 

3. 주제의 확장, 혹은 어떤 발원

 김욱진의 시적 관심이나 시선은 앞서 논의한 대개인적인 것 말고도 전공과 관련한 대사회적인 면도 엿보인다. 그는 자살(〈어떤 발원〉)․이혼(〈은행나무․1〉)․유괴(〈유괴된 그 아이-허은정 양〉) 등과 같은 개인적 차원에서의 사회 문제를 비롯해, 사회 구조적 차원에서 야기되는 노인(〈산다는 것은〉)․농촌(〈농심〉)․환경(〈꿈속의 어린왕자〉)문제, 심지어 통일(〈자연휴양림에서〉) 문제에 이르기까지 시적 관심의 폭을 가일층 넓히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타자에 대한 관심과 이목은 가난한 우리의 이웃, 내지는 예술 작품을 통한 현실 비판의 혁명가에게 모아져 있다.

 

〔1〕

학생들이 등교하는 시각이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학교 쓰레기장으로 출근하는 최씨 노부부 (…) 누구도 반갑게 맞아주는 이 없지만 (…) 운동장 한 모퉁이 쓰레기장에서/ 버려진 행복을 주워담는 최씨 노부부/ 정오 무렵이면/ 허기진 리어카도 어느새/ 가득 차오른 폐휴지 더미로 배가 부르다

-〈학교 쓰레기장으로 출근하는 최씨 노부부〉일부

 

〔2〕

인간 노동시장에서 지금도/ 전설처럼 살아 있는 체게바라,/ 사진전 한 구석에/ 이름조차 없는 송이 꽃으로 붙어 있다 (…) 체 게바라, 체 게바라, 체 게바라/ C․F2008 11061900Kr/ *****(체 게바라 꽃의 혁명일 암호)/ 우주의 바코드는 영원히/ 체게바라․꽃으로 기억할 것이다

-〈체 게바라, 꽃으로 환생하다-박진우 사진전〉일부

 

〔1〕이 개인적 타자로서 가난한 노부부의 일상을 다루고 있다면,〔2〕는 사회적 타자로서의 혁명가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어느 사진전에서 본 쿠바의 지도자 체 게바라(1928-1967, 아르헨티나 출신의 사회주의 혁명가이자 정치가, 의사. 본명은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그의 사회적 관심의 기저에는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깔려 있다.〔1〕에서 누구도 반갑게 맞아주는 이 없고,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은 이에게 시인의 시선은 머물러 있다. 뭇사람들이 밝고 화려한 광장을 찾을 때 최씨 부부는 어둡고 칙칙한 모퉁이에서 오히려 삶의 행복을 찾는다. 장소로 말하자면 전방 지역(운동장)이〈양/남성/밝음/성〉을 의미한다면, 후방 지역으로서의(한) 모퉁이는〈음/여성/어둠/속〉을 지칭한다. 그렇게 본다면 시인은 기질적으로 후자에 경도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참된 삶의 행복이나 진리란 주로 빛이 아니라 그림자에서, 성스럽고 초월적인 장소보다는 세속의 저자거리나 길모퉁이에서 비롯되는 때문이다. 가난한, 그러나 행복한 노부부가 모는 리어카의 수레바퀴처럼 우리네 인생이란 돌고 도는 것이고 보면 그들에게도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리라 믿는다. 그렇다면, 문제는 여전히 마음이다.〔2〕의 경우는〔1〕에 비해 기법상 실험적인 면을 일견 취하고 있으며, 반복되는 리듬과 호흡에서 불경을 염하는 느낌마저 든다. 사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인물(체 게바라)이 간절히 소생하기를 기원이라도 하는 것일까. 부귀영화나 출세를 마다고, 그것도 낯선 타국에서 민중의 자유와 의를 위해 짧은 생애를 살다 간, 그리하여 지금도 여전히 전설처럼 살아있는 체 게바라, 그에 대한 추모의 시간과 장소는 딱히 정해진 것이 없다. 꽃으로 환생한 게바라는 자신의 실천적 삶으로 지구는 물론, 우주(의 바코드)는 영원히/ 체게바라으로 기억할 것이다.?자본과 노동이 상품화하고 내부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김욱진 시의 주제에 있어 그 양상은 조금씩 다르지만 거개가 불교적 사유와 세계 인식, 그리고 전공에 걸맞은 사회학적 상상력의 표현 기법 속에서 찾아진다. 그는 자아와 현실의 문제를 자연적/선적禪的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데 장기를 발휘한다. 뿐 아니라,〈도성암 가는 길․2-비슬산․2〉에서 김욱진이 펼쳐 보인 득의의 시각에는 갖가지 자연물이나 대상 자체가 보살의 화신化身이자 법문法門의 주체로 거듭나 있다. 본래의 심성이 맑고 깨끗한 불교적 인간관을 지니고 있는 그는, 비슬산이란 유원한 장소에 대한 사랑topophilia을 통해 사유의 폭과 깊이를 더한다.?어디선가/ 날아오르는 새 한 마리(가)/ 허공(을) 가득 채(〈가을 하늘〉)우고 있는 그의 눈은/ 숫제 선정禪定에 들(〈고요의 성자-벙어리〉)어 있다. 그의 이러한 시적 직관과 인식 능력은 이후 간행될 시집의 역량을 가늠, 예고한다. 문제는 자칫 그의 불교적 사유와 세계 인식을 두고 현실과 유리된 것으로, 딴은 니힐nihil한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는 그렇지가 않다. 맑은 영혼과 깨어 있는 정신으로 평상심을 유지하려는 그는 언제나 지상으로 다시 돌아오기(당신의 발걸음은 곧/ 울고 웃고 부대끼던 그곳(현실-필자주)으로/ 회향回向하지 않던가〈어떤 발원〉)위해 부심하며 고뇌할 따름이다. 고요하면서도 힘이 있는 그의 발원(겨울 허공 훨훨 날아가는 기러기 떼처럼/ 둥지를 박차고 어디론가 고요히 떠나보라(〈어떤 발원〉)이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온몸으로 전해진다. 그런 나는 오늘도 홀연,/ 삼매에 든 선승(처럼)// 텅 빈 나뭇가지에/ 겉옷 한 벌 벗어둔 채// 어디론가/ 훌훌 떠나버(〈매미〉)릴 채비를 서두르고 있는 그를 지켜보며, 머잖아 더욱 새롭게 번신翻身할 그의 시와 삶을 꿈꾼다. 그가 사는 비슬산은 여전히 달빛으로 충만하다. 골골마다 거문고 소리 들릴 것 같은 숲은 아름답고 고요하다/ 그러나 나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어/ 잠들기 전 몇 마일을 더 가야만 한다. (R․프로스트,〈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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