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인
정호승
성철 스님 돌아가신 날
인산인해를 이루며
해인사 올라가는 길에
폐타이어를 양쪽 다리에 친친 감고
플라스틱 바구니를 앞에 놓고
엎드려 구걸하는 한 사내를 만났습니다
나는 급히 지나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오늘 돈 좀 벌었느냐고 넌지시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가 큰스님은 돌아가시고 나서도
이렇게 저를 돌보아주십니다
하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정말 그의 플라스틱 바구니엔
천원짜리 사이사이에
만원짜리도 몇장 섞여 있었습니다
성철 스님을 다비하고
가물가물 연화대의 흰 연기처럼 사그라진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해인사 내려오는 길에
무릎 없는 그 걸인을 다시 만났습니다
나는 돈 좀 더 많이 벌었느냐고
그에게 또 넌지시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가 지금까지 번 돈 중에서
가장 많이 벌었다면서
성철 스님처럼 빙그레 웃었습니다
정말 그의 플라스틱 바구니엔
미처 그가 거두지 못한 만원짜리 지폐가
가야산 낙엽처럼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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