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참깨밭이다/장옥관

김욱진 2013. 12. 19. 15:52

참깨밭이다

―장옥관(1955~  )


다글다글 깨알들 부딪는 소리 들린다 딱딱한 껍질 단칸 하꼬방 아직 풋내 나는 푸른 씨앗들이 살을 말리고 있다 온종일 뙤약볕 골목길을 쏘다니던 어린것들 머리꼭지 실하게 여물었겠다 불볕 뜨거울수록 고소하게 익어가는 참깨들 연탄 화덕에는 먹다 남은 술안주 갈치찌게가 졸아들고 있다 누가 맨 처음 저 씨앗을 훔쳐먹기 시작했을까 이웃 공장의 매캐한 화공약품 냄새 반 평 깨밭의 간당거리는 대궁이를 옥죄어 온다 쭉정이는 바싹 뼈대만 남아 이제 무너질 힘조차 없다 알루미늄 양재기에 담배꽁초가 소복하다 태우고 또 태워 필터만 남은 실직의 시간 시퍼런 멍 자국의 깨벌레 한 마리 보이지 않는 잎 뒤에 숨죽여 엎드려 있다 좁은 골목길 갑자기 환하게 수다스러워진다 굵은 다리통 파출부 아내가 돌아오나 보다

 

 

 

 ―[조선일보] 가슴으로 읽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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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단'이라고 부르는 지역이 있(었)다. 여러 가지 제조업이 밀집해 있는, 우리나라 산업의 역군들이라고 칭송받는(진심으로 칭송하는 것인지는 의심스럽지만) 분들의 일터다. 그곳의 한 모퉁이 풍경을 이 시는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허름한 간이 주막이 있고 그 근처 공터에 마침 깨밭이 있다. 이 밭은 문득 이 공단 사람들의 살림살이와 내면의 상징으로 다가온다. 초가을 뙤약볕이 내리쬐어 참깨들은 여물어가고 쭉정이는 무너질 힘도 없이 건들건들 말라간다. 일자리를 잃은 중년이 간이 주막에서 화공약품 냄새와 더불어 이른 술추렴을 하고 있다. 속칭 '하꼬방'이라고 불리는(던) 단칸방이 이 중년 가장의 생활 공간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질기디 질긴' 재질의 알루미늄 재떨이 안에 가득하다. 다행은 '다리통 굵은 파출부 아내'가 수다스럽다는 것이다. 수다도 이럴 때는 아름답다. 깨알처럼 여물어가는 아이들 이야기였을까? 이들의 재떨이가 투명해질 날은 올 것인가! 이들의 재떨이를 진심으로 비워줄 대통령 후보를 찾아본다.  

-장석남·시인·한양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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