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성 비판
대구제일고 교사 김욱진
(가)
17세기까지 유럽 인들은 억압적인 종교와 전통적인 관습의 울타리 안에서 숱한 미신에 얽매여 살았습니다. 전염병이 돌면 과학적으로 원인을 찾아내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마녀가 저주를 내린 것이라며 마을에서 제일 수상한 여자를 잡아 마녀 재판을 여는 식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주로 이 세상에서 사라져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여자를 마녀로 지목했습니다. 예를 들어, 늙고 가난한 노파의 경우는 마을 사람들에게 심리적 부담감을 주어 마녀로 지목 당했고, 너무 젊고 예쁜 처녀는 남자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기 때문에 여러 여자들에게 시새움의 대상이 되어 마녀로 지목 당했습니다. 이 끔찍한 마녀 재판은, 왜 중세가 무너져야 하고 근대적 질서가 새롭게 열려야 하는지를 웅변적으로 보여 준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17세기 이래로 꾸준히 발전해 온 자연 과학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우주의 개념과 질서를 새롭게 알게 되었고, 인간과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인식 또한 얻게 되었습니다. 특히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Nicolaus, 1473~1543, 천문학자는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서 몰아내어, 무한한 공간의 구석에 있는 한 점으로 떨어뜨렸습니다. 드디어 인간이 ‘주제 파악’을 한 것입니다. 근대인은 이성의 힘으로 스스로 서 있는 위치를 알게 되면서, 이 사실을 깨닫게 해 준 이성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냅니다. 이처럼 중세의 무지와 어둠의 장막을 걷어 버리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 바로 ‘이성’이었습니다. 이성은 인류가 맹목과 무지로 이어진 중세의 어둠을 뚫고 근대라는 새 시대를 여는 상징이었습니다. 이성의 빛으로 암흑의 지배를 극복한다는 의미에서 사람들은 유럽의 18세기를 ‘빛의 세기’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이성의 힘에 기대어 절대 진리를 찾고자 한, 근대 최초의 철학자가 바로 데카르트Ren Descartes, 1596~1650, 프랑스의 철학자·수학자·물리학자, 근대철학의 아버지입니다. 중세의 진리 체계가 무너져 내리는 혼란 속에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를 추구하던 그는, 그 투명한 진리를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에 담았습니다.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중세적 사유 방식에서 벗어나, 그는 이제 인간의 주인은 신이 아니라 바로 사유하는 그 자신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철학의 토대가 되는 근원적인 확실성을 ‘신’에게서 찾지 않고, ‘나’라는 인간의 이성에서 찾게 되면서 신 중심의 세계관에 치명상을 입혔습니다. 이제 인간 존재의 주인은 신이 아니라 바로 사유하는 그 자신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실로 벅찬 감동이었습니다. 흔히 베토벤의 「환희의 찬가」를 주인으로 해방된 인간의 시대를 찬미한 노래라고 하는데, 바로 이 노래가 그 시대의 환희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으로 드디어 신 중심의 중세가 무너지면서 세계의 중심에 인간이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고 이성에 의한 인류의 진보를 확신하는 사상이 19세기까지 이어졌습니다. 정말이지 계몽의 아침 햇살은 참으로 눈부셨습니다. 이성은 근대 이후 계몽의 역사에 견인차 역할을 하였습니다. 신비적 계시라는 그럴 듯한 이름 아래 안개처럼 휘감아 오던 맹목적 권위와 종교적 강압을 삶의 구석구석에서 걷어 내었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의 이성을 신뢰했고 이성에 의해 인류 문명이 진보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던 시대였습니다.
사실, 서양에서 근대 이전에는 진보에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은 한차례 돌아서 다시 먼저의 자리로 돌아온다는 순환론이 주도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성의 힘에 의해 과학 기술이 빠르게 발달하면서, 진보에 대한 믿음이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과학적 진보와 함께 산업화가 가져다 준 생산력의 증대와 생활수준의 향상도 진보에 대한 믿음이 두루 퍼지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의 삶이 어제보다 낫고 내일의 삶이 오늘보다 나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나)
이성의 밝은 빛으로 세계를 비추려던 기획project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긴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그리하여 19세기 말부터 곳곳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이러한 비명은 노르웨이의 화가 뭉크Munch Edvard, 1863~1944에 의해 공포 앞에서 전율하는 「절규」라는 시대의 표정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 얼마 뒤 인류는 두 차례에 걸쳐 세계대전이라는 끔찍한 전쟁에 휘말리며 처절한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세계사는 야만에서 휴머니티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투석기에서 핵폭탄으로 전개해가는 과정일 뿐이다.”라는 아도르노의 말처럼, 사람들은 이성의 역설에 몸서리를 쳐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근대가 낳은 합리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본디 ‘근대적’이라는 단어는 무엇보다도 인간 이성에 대한 굳은 믿음과 함께 삶이 전반적으로 합리화되어 간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다시 말해, ‘근대적’이라는 말은 기술적으로 앞서 있고, 물질적으로 부유하며, 사회적·종교적으로도 권위라는 미망迷妄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가리켰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근대화는 합리화와 사상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합리성의 문제를 근대화의 핵심적인 주제로서 다룬 사람이 막스 베버Weber, Max, 1864~1920, 독일의 사회과학자입니다. 그는 서양에서 근대화의 과정을 삶의 점진적인 합리화로 이해하였습니다.
합리화란, 우리와 세계를 설명하는 데 더 이상 신비롭고 예측 불가능한 힘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세계는 이제 탈미신화, 탈신비화 되었습니다. 야만인들은 신령들을 제어하거나 그들에게 간청하기 위해 마술적인 수단을 사용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기술적 수단과 계산이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근대의 서양 세계에서 합리화가 지배적인 현상이 되면서, 그 영향은 경제와 관료 행정의 영역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베버는 근대 사회에서 집단을 운영하는 데 합리적인 제도인 관료제에 주목하였습니다. 제도화된 권력에 바탕을 둔 통제는 근대 이성주의자들이 생각해 낸 지배 형식인데, 이런 통제 형식의 전형이 바로 관료제입니다. 근대가 성립하는 과정에서 이전보다 훨씬 넓은 지역을 관리하려다 보니 각 지역의 인구 변동과 생산력, 토지 소유, 가족 관계 등의 수치가 통계적으로 필요했고, 각 지역의 치안 유지와 행정 집행을 수월하게 하는 체계적인 관료 제도가 필요해진 것입니다. 더욱이 교회의 권위가 약화되면서 교회가 담당하고 있던 일상에 대한 관리 기능까지도 국가가 담당해야 했으므로 관료 제도는 점점 정밀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관료제를 통해 많은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효율성이 중시되어야 했습니다. 때문에 이성적으로 구조화되고 조직화된 위계적 제도가 필요했습니다. 일에 대한 구상과 실행이 분리되고, 다시 그 실행의 업무가 여러 부문으로 나누어지면서, 각 부서는 주어진 업무만을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일의 전말을 아는 사람이 드물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단계에만 익숙해져, 무엇인가 덜떨어진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컨베이어 벨트에서 부속품 하나만 하루 종일 끼우는 노동자는 더 이상 세계의 주인으로서의 이성적 존재가 아닙니다. 베버는 이러한 현상을 ‘합리성의 쇠 감옥’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합리성이라는 형식 안에 갇혀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기본적인 인간성마저 부정된다는 의미에서 쇠감옥인 것입니다.
베버에게 합리화는, 인간이 주어진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계측 가능한 어떤 규칙에 의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진보’이지만, 개인의 창의성이 무시되고 그 합리성의 체계 안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쇠 감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근대화의 과정은 실질적 가치의 추구라고 할 수 있는 실질 합리성substantive rationality에 대한 형식 합리성formal rationality의 우위로 상징되며, 점차 증가하는 형식 합리성은 궁극적으로 비합리성을 심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삶의 전반적인 합리화가 자유의 상실과 제도에의 복속을 가져오는 이러한 현상이야말로 근대화의 배리背理, 이치에 어긋남이며 이성의 역설逆說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해방과 자유의 실현을 내걸고 추진된 이성의 기획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재의 시점에서도 그리 성공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비록 근대화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서구 사회가 합리성에 토대를 두고 발전해온 과학 기술의 눈부신 성과에 힘입어 그 어느 때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지만, 그 같은 풍요의 뒤꼍에는 수많은 근대화의 병리가 켜켜이 쌓여가고 있습니다. 비인간화한 소외된 삶이 널리 퍼지는 것과 전지구적인 생태계의 위기가 점차 높아지는 것이 단적인 예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무지의 상태를 벗어나서 성숙한 자율적 인간을 추구하려는 이성의 본래 이념과 배치됩니다. 이성의 이념에 기초한 근대화의 과업은 이처럼 새로운 억압 체계에 인간을 가둠으로써, 진보와 발전이 아닌 역사의 퇴행을 가져왔으며, 자유의 실현 대신에 비인격적인 경제적 힘의 지배, 관료적으로 조직된 행정의 지배를 야기했을 뿐입니다.
(다)
잡종이란 말이 주는 어감에서 느낄 수 있듯이 사람들은 잡종을 천한 것으로, 되어서는 안 될 것으로 여겨 왔다. 길짐승과 날짐승의 세계를 넘나들다 결국 양쪽 모두에게서 배척받은 박쥐의 이야기가 잡종의 부도덕성과 그로 인한 몰락을 잘 암시하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서도, 이것저것 섞는다는 의미의 '짬뽕' 같은 말이 잡종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인간 사회에서 잡종의 존재 조건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집단은 혼혈아들인데, 미국 사회학자들은 한때 미국의 혼혈아들이 흑·백 어느 인종에도 소속감을 갖지 못함을 지적하면서 이들을 사회를 불안하게 할 소지가 있는 '주변인들'(marginalized social group)로 규정한 적이 있다. 원래 짬뽕과 같은 미국사회에서 잡종에 대한 인식이 이러했으니, 단일 민족과 단일 문화를 자랑하는 우리의 역사적 전통에 비추어 볼 때, 잡종에 대한 우리의 편견은 차라리 이해할 만하다고 하겠다.
우리에게 친숙한 두 범주·존재 사이에 잡종 범주, 잡종 존재를 상정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잡종을 배척하는 세계관의 많은 부분이 이분법적 사고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분법적 사고나 이것이 발전한 철학적 체계로서의 이원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체계적·분석적 사유의 기초가 되었다. 중국 철학의 음(陰)/양(陽)이나, 서양 철학의 형식/물질, 존재/생성, 정신/육체, 연역/귀납, 분석/종합, 서양 과학의 생물/무생물, 음전기/양전기, 북극/남극, 학문 방법론의 자연 과학적/해석학적 방법 등이 흔히 볼 수 있는 이분법적 사고 범주들이다. 이러한 범주들의 기원은 음/양이나 고대 그리스 철학의 더움(hot)/차가움(cold),마름(dry)/축축함(wet)의 범주처럼 우리의 일상 경험에 있었거나, 또는 남성/여성의 범주처럼 자연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분류 체계에 있었다. 동시에 대조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 이성의 기본적 메커니즘과 관련이 있었다. 자연 철학에서 자연의 극성(polarity)을 강조하는 경향은 18세기 후반 독일의 자연 철학자들에 의해 부활되었는데, 이들은 17세기 과학 혁명인 뉴턴 과학의 기계적 세계관에 반대해서 자연계의 조화와 다양한 자연 현상의 통일성을 강조했고, 극성을 이러한 자연의 통일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성질로 인식했다. 자연 현상이 대립적인 두 극성의 발현을 통해 나타난다는 생각은 사회와 역사가 상반된 두 계급의 투쟁을 통해 발전한다는 마르크스주의 사회사상의 발전과 역사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으며, 이는 이후 엥겔스의 '자연 변증법'의 중요 개념이 되기도 했다.
이분법은 때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사고의 틀을 제공한다. 둘을 또 둘로 쪼개면 넷, 넷 각각을 둘로 쪼개서 8진법, 넷을 셋으로 쪼개서 12진법이 만들어졌다. 세계에는 불과 흙이 있어야 하고, 이 두 원소는 산술 평균을 잡아서 이를 공기와 물이라 한 것이 플라톤의 기하학적 4원소 이론이었다. 이 4원소를 천상계와 지상계의 두 세계에 배열하고,4원소와 더움/참, 마름/축축함의 4형질의 결합으로 세계와 인간을 설명한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세계는 운동과 물질로 구성되어 있으며, 운동과 물질은 물질세계를 구성하지만 이 물질 세계와는 또 다른 정신세계가 존재한다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체계화시킨 철학자이자 과학자는 데카르트였다. 이 밖에 이분법적 사고는 과학과 수학에서도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모든 정보를 0과 1만의 2진법 조합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20세기 정보 이론의 철학적 기반도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의 결실이었다. -홍성욱,'잡종, 새로운 문화 읽기'
(라)
얼마 전에 어느 방송사에서 북한 혁명가로 통칭되는 「적기가」를 배경음악으로 40초 동안 방영해서 난리가 났습니다. 단순한 실수였는데도, 그렇고 그런 신문들이 이를 두고 국가보안법 위반 여부를 쟁점으로 다루기 시작하면서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습니다. 결국 해당 방송사는 공개 사과와 함께 책임자 문책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음악계 일각에서는 적기가의 원조를 거론하며 색깔론 시비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였습니다. 독일 민요 「소나무Der Tannenbaum」에서 바탕을 둔 적기가는, 19세기 말 영국으로 건너가 노동가 「적기赤旗, The Red Flag」로 개사되었다가 다시 일본에서 노동가로 번안되었으며, 1930년대 한반도에 들어와 북한과 만주 일대에서 널리 불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민족시인 김남주金南柱, 1946~1994가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울부짖은 까닭을 이제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삼팔선은 “미팔군 병사의 군화에도 있고”, “당신이 가다 부닥치고야 마는 / 입산금지의 붉은 팻말에도 있으며,” “새벽같이 일어나 일하면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 농부의 졸라 맨 허리에도 있고”, “제 노동을 팔아 / 한 몫의 인간이고자 고개 쳐들면 / 결정적으로 꺾이고 마는 노동자의 / 휘어진 등에도 있습니다.” “거재巨財를 쌓아올려 / 도적도 얼씬 못하게 가시철망을 두른 / 부자들의 담벼락에도 있고”, “피 묻은 자유로 몸부림치는 창살 / 삼팔선은 감옥의 담에도 있고”, “침묵의 벽 / 그대 가슴에도 있습니다.”
그 삼팔선이 “소리와 빛과 별”에도 가로놓여 있다는 시적 화자의 고백이 김남주의 시에 오버랩 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정말이지, 우리는 북한이 즐겨 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동무’라는 소리를 입에 올리기도 어려운 시대를 살아왔습니다. ‘인민’이라는 그 좋은 단어마저도 모든 공식적 대화에서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붉은빛으로 된 머리띠만 해도 사상을 검증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하늘의 별을 그리면서도 북의 깃발을 상징하는 어떤 모습이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자기 검열을 하며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처럼 민족분단이 고착화되고 심화되면서 고단한 우리의 삶은 결국 자기 분열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
「도다리를 먹으며」-김광규
일찍부터 우리는 믿어 왔다.
우리가 하느님과 비슷하거나
하느님이 우리를 닮았으리라고
말하고 싶은 입과 가리고 싶은 성기의
왼쪽과 오른쪽 또는 오른쪽과 왼쪽에
눈과 귀와 팔과 다리를 하나씩 나누어 가진
우리는 언제나 왼쪽과 오른쪽을 견주어
저울과 바퀴를 만들고 벽을 쌓았다.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자유롭게 널려진 산과 들과 바다를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누고
우리의 몸과 똑같은 모양으로
인형과 훈장과 무기를 만들고
우리의 머리를 흉내내어
교회와 관청과 학교를 세웠다
마침내는 소리와 빛과 별까지도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고
이제는 우리의 머리와 몸을 나누는 수밖에 없어
생선회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신다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어
온몸을 푸들푸들 떨고 있는
도다리의 몸뚱이를 산 채로 뜯어 먹으며
묘하게도 두 눈이 오른쪽에 몰려 붙었다고 웃지만
아직도 우리는 모르고 있다
오른쪽과 왼쪽 또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결코 나눌 수 없는
도다리가 도대체 무엇을 닮았는지를
[논제 1] 제시문 (가)와 (나)는 시대 흐름에 따른 이성의 명(明)과 암(暗)을 다룬 글이다. 이를 각각 요약하시오(800자 내외로).
➲ 위 논제는
요약 문제다. 최근 수시 논술에서 대부분 대학들이 출제하고 있는 기본 문제 유형 중 하나다. 제시문 내용의 주제 파악을 정확히 하고, 이를 요구하는 분량대로 요약할 수 있는지를 알고자 한다. 따라서 제시문 (가)와 (나)의 핵심 주장과 이를 뒷받침하는 주요 논거를 제시하며 답안을 작성하면 되겠다.
(논제1 분석)
제시문 (가)와 (나)의 주제를 각각 명확히 파악해야 한다. 제시문의 내용 전개 과정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주제어들이 있다면 그것을 놓쳐서는 안 되며, 주제어를 통해 표현하는 주요 내용도 빠짐없이 다루어야 한다. 제시문 (가)와 (나)는 ‘이성의 명과 암’을 각각 밝힌 글이다. 제시문 (가)의 핵심 주제는 ‘이성, 새 시대를 여는 빛으로 다가오다’이고, (나)의 핵심 주제는 ‘이성, 역사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다’이다. 따라서 이를 뒷받침하는 주요 논거를 각각 논리적으로 정리해서 요약하면 된다. 제시된 글 내용상 이러한 논거와 주장을 논리적으로 잘 연결하고, 자신의 언어로 매끄럽게 다듬으면 적절한 답안이 될 것이다.
[논제 2] 제시문 (다)와 (라)의 논지를 밝히고, (마) 시의 성향과 궤를 같이하는 어느 한 관점에 근거해서 (마)를 해설하시오.(1,200자 내외).
➲ 위 논제는
복수 제시문에 두 개 이상의 복합 논제를 제시하고 있다. 이 문제처럼 하나의 주요 논제에 몇 가지 하위 논점을 해결할 것을 요구하는 유형이 최근 출제 경향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설득력 있는 견해를 함양해야 하며, 논제에서 요구하는 사항을 논리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능력도 아울러 길러야 한다. 또한 제시문에서 하나의 논점만을 찾아서는 안 되고 다양한 논점을 분석해내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논제2 분석)
제시문 (다)와 (라)의 ‘논지를 밝히라’는 익숙한 요구 조건과 그 두 논지 중 하나를 참고하여 제시문 (마)를 ‘해설하라’는 새로운 형식의 요구 조건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제시문 (다)와 (라)의 핵심 주장과 논거를 구체적으로 밝힌 후, (마)의 시 성격과 궤를 같이 하는 어느 한 주장에 근거해서 (마)를 분석한다. 특히, 두 번째 요구 조건에 주의해야 한다. 별로 어렵지 않은 시이지만 ‘시’라는 문학 장르의 특성을 고려해, 시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특정 ‘시어’를 적절히 인용하면서 그것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분석해주는 것이 좋다. 그리고 답안 작성 시에 요구조건의 특성상 논지를 밝히는 부분보다는 해설하는 부분을 더 자세히 기술해야 할 것이다.
제시문 분석
제시문 (가)와 (나)는 이성의 명明과 암暗을, (다)와 (라)는 이분법적 사고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각각 비중 있게 논하고 있다. (마)는 일상생활 속에 길들여진 이분법적 사고의 모순점을 시인은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제시문 (가)의 핵심 주제는 ‘이성, 새 시대를 여는 빛으로 다가오다’이다. 이를 뒷받침할 주요 논거는 ① 이성은 인류가 맹목과 무지로 이어진 중세의 어둠을 뚫고 근대라는 새 시대를 여는 상징 ②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중세적 사유 방식에서 벗어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 명제 ③ 이성의 힘에 의해 과학 기술이 빠르게 발달하면서 진보에 대한 믿음의 확산 등이다.
제시문 (나)의 핵심 주제는 ‘이성, 역사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다’로 집약된다. 이에 대한 주요 논거는 ① 컨베이어 벨트에서 부속품 하나만 하루 종일 끼우는 노동자는 더 이상 이 세계 주인으로서의 이성적 존재가 아님 ② 삶의 전반적인 합리화가 자유의 상실과 제도에의 복속을 가져오는 이러한 현상이야말로 근대화의 배리(背理), 이치에 어긋남이며 이성의 역설(逆說)임 ③ 이성의 이념에 기초한 근대화의 과업은 이처럼 새로운 억압 체계에 인간을 가둠으로써, 진보와 발전이 아닌 역사의 퇴행을 가져왔으며, 자유의 실현 대신에 비인격적인 경제적 힘의 지배, 관료적으로 조직된 행정의 지배를 야기함 등이다. 이를 종합해 볼 때, 제시문 (가)는 이성의 긍정적 측면을, (나)는 부정적 측면을 논하고 있다.
제시문 (다)는 이분법적 사고의 양면성을 언급하고 있으나 긍정적 측면을 더 강조하는 입장이다. 이에 반해, 제시문 (라)는 이분법적 사고의 부정적 측면만을 밝히고 있다. 특히, 제시문 (라)에서는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김남주의 시를 통해 남북분단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이분법적 사고의 부정적 측면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제시문 (마)는 김광규의 「도다리를 먹으며」라는 시다. 시인은 구체적 사물을 소재로 우리 현실의 모순인 이분법적 사고를 비판하고 있다. 이 시는 1980년대에 발표된 작품으로, 시인은 두 눈이 모두 한쪽으로 몰려 있는 도다리의 모습과 모든 존재를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어 대립시키는 사람들의 행태를 대비하여 당대 사회에 만연했던 흑백 논리를 풍자하고 있다. 1980년대의 우리 사회는 좌파와 우파의 대립, 현실과 이념의 대립 등 사고의 경직성과 획일성이 만연해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우리 사회에는 이념의 대립과 같은 관념에 집착하는 태도보다는 현실의 문제와 자신의 내부 모순에 주목하는 태도가 가장 필요하였다. 시인은 자신의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 얻은 흑백 논리의 허구성을 일상 언어로 쉽게 표현하여 당시의 사람들에게 자기반성을 촉구한 것이다.
논제1 예시답안
제시문 (가)는 이성의 긍정적 측면을, (나)는 부정적 측면을 논하고 있다. 제시문 (가)는 이성이 강조된 17․8세기 시대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인간 이성을 새 시대의 빛으로 인식한다. 이를 뒷받침할 논거로 첫째, 이성은 인류가 맹목과 무지로 이어진 중세의 어둠을 뚫고 근대라는 새 시대를 여는 상징이다. 둘째,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중세적 사유 방식에서 벗어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 명제에서 그러하다. 셋째, 이성의 힘에 의해 과학 기술이 빠르게 발달하면서 진보에 대한 믿음이 널리 확산되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를 요약하면, 이성은 신 중심의 중세적 인식에서 벗어나 인간 중심의 근대적 인식의 뿌리가 되었다.
이에 반해 제시문 (나)는 이성의 어두운 면을 논하고 있다. 이에 대한 주요 논거로는 첫째, 컨베이어 벨트에서 부속품 하나만 하루 종일 끼우는 노동자는 더 이상 이 세계 주인으로서의 이성적 존재가 아니다. 둘째, 삶의 전반적인 합리화가 자유의 상실과 제도에의 복속을 가져오는 이러한 현상이야말로 근대화의 배리(背理), 이치에 어긋남이며 이성의 역설(逆說)이다. 셋째, 이성의 이념에 기초한 근대화의 과업은 이처럼 새로운 억압 체계에 인간을 가둠으로써, 진보와 발전이 아닌 역사의 퇴행을 가져왔으며, 자유의 실현 대신에 비인격적인 경제적 힘의 지배, 관료적으로 조직된 행정의 지배를 야기했을 뿐이다. 이를 종합하면, 이성이 역사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논제2 예시답안
제시문 (다)는 이분법적 사고의 양면성을 밝히고 있으나, 전반적으로 긍정적 측면을 더 강조하는 입장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이분법적 사유는 체계적·분석적 사유의 기초가 되며, 인간 이성의 기본 메커니즘에 부합한다. 또한 수많은 과학적 발견을 가능하게 한 강력한 사고의 틀을 제공했다.”등에서 쉽게 알 수 있다. 한편, 제시문 서두에 언급한 박쥐, 짬뽕, 주변인 등의 단어에서 부정적 측면도 확인할 수 있다. 세상에는 혼혈인들과 같이 이분법적 범주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소위 '잡종'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은 기존의 이분법적 사고 체계 아래에서는 소외되고 배척당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분법적 사고는 우리 주위의 중요한 현상이나 사건을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의 부정적 측면만을 강조한 글은 바로 제시문 (라)이다. 제시문 (라)에서는 어느 방송사의 북한 혁명가인 “적기가” 방영을 적대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즉, 이분법적 인식의 부정적 측면이 남북 분단뿐만 아니라 우리 생활 곳곳에 스며 있음을 시인 김남주의 글을 인용해 강렬히 비판하고 있다.
제시문 (마)는 구체적 사물을 소재로 현실의 모순인 이분법적 사고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따라서 (마) 시의 성격은 이분법적 사고의 부정적 측면을 밝힌 (라)의 입장과 동일하다. 특히, 일상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이분법적 사고의 부정적 측면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라)에 예시한 김남주의 시와 (마)의 김광규 시는 궤를 같이 한다. 시인은 중심과 주변의 대립, 지배와 복종의 대립, 가진 자와 소외된 자의 대립 같은 일체의 분열적인 삶의 모순을 타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융합과 합일의 세계를 도다리에서 찾고 있다. 1연에서 시인은 인간의 폐쇄적이고 독선적인 사고가 이성에 대한 과신에서 비롯됨을 지적한다. 2연에서는 좌우 대칭 구조로 된 인간의 이분법적 사고가 대립과 흑백논리를, 3연에서는 나눔과 분열의 상황인 남북분단을, 4연에서는 이분법적, 독선적 사고를 조장하고 가르치는 물리적, 정신적 억압 기제의 양산을 구체화하고 있다. 즉, 인형-명령을 수행할 꼭두각시, 훈장-맹목적인 충성자, 무기-위협의 도구로써 나눔과 분열을 조장하는 물리적 기제들이고, 교회와 관청과 학교는 인간의 의식과 정신을 통제하는 정신적 기제들이다. 시인은 이러한 인형․훈장․무기․교회․관청․학교 등의 기제들이 바로 나눔과 분열을 고착화시키는 도구라고 보았다. 5연에서는 편협하고 이분법적인 사고의 한계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인간에 대해, 마지막 6연에서는 조화와 합일의 가치(도다리)를 인식하지 못하는 세태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이슈&논술 2008.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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