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스크랩] 칼날 / 장옥관

김욱진 2015. 4. 7. 22:23

 

칼날

 

장옥관

 

 

 칼날이 무뎌 햇빛에 비춰보니

 주름살지듯 잡힌 자잘한 흠집투성이

 무, 파만 써는 부엌칼인데 왜 날이 나가는 걸까

 면도날 입에 넣고 씹는 깻잎머리 소녀처럼 배추, 당근이 우물우물 쇠 씹는

취미 가진 건 아닐 텐데

 

 흰 종이에 자주 손가락 베이는 나로선

 칼이 풀을 베는 게 아니라

 이슬이 풀잎을 벤다는 걸 믿을 수밖에 없고

 

 도마가 칼날을 물어 뜯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천둥이 구름 속에서 우는 소릴 듣지 못한 귀머거리거나 돌멩이 속에서 새소

리를 꺼내보지 못한 사람들일 터

 

 칼의 날이 빠지는 건,

 수십 년 몸 섞은 내연의 관계에도 가차 없이 쑤셔 박히는 게 칼이라 해도 때

로는 숫돌에 몸 맡기고 싶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기에 숫돌도 그 마음 알고 순순히

 제 부드러운 살점 떼어

 칼날에게 먹이는 것 아니겠는가

 

 

2015년 문학.선 봄호

 

 

 

 

 

 

출처 : 대구시인협회
글쓴이 : 화양연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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