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박사로 가는 길/류근

김욱진 2015. 5. 6. 13:55

         박사로 가는 길

            류 근

 

 

교수가 될 어림도 미래도 없으면서

학교라도 안 가면 술집 귀신이나 될 터인데 싶어

또 비틀비틀 박사 들으러 간다

강의실에 앉으면 비로소 숙취가 좀 헹궈지는 것이

타고 난 박사 체질인가 싶어 싱겁다가도

남 몰래 창 밖 구름과 잎사귀나 훔쳐보고 있는 퇴행을 보면

아, 갈 데 없는 바깥 체질이구나 싶어 곧 안심이 된다

나는 너무 많은 것들을 배우고 익히느라

정거장이 지나가고 작년의 나무가 더 자라고

담쟁이가 진짜로 담을 넘는 소식에 멈춰 있지 못 하였다

남편 있는 여자와 옛날 애인들의 소식이 간간이 그리웠을 뿐

술집 너머의 연애 같은 것에 등록금을 납부할 수 없었다

박사가 깊어질수록 뼛속의 시가 가벼워져서

나는 자주 강물까지 날아가 내 하얀 발목을 베고 눕고

누워서 어떤 전생을 배신해 버릴까 궁구하였다

돌이켜보면 과거가 깨끗한 여자가 한 명도 없었던 것처럼

몇 번의 나쁜 전생이 나를 여기까지 엎질러 놓았을 뿐이라는 걸

에필로그처럼 읽는 날은 즐거웠다 뻔한 것은

얼마나 느리고 안락한가 남자가 원해서 거기 털을 밀어주었다는

남쪽 후배가 내미는 술잔은 따뜻하고 나는 사막과

머리 두 개 달린 염소와 주인 잃은 소녀가 통정하는 소설을

박사로 가는 길에 깔아두면 좋을 거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박사는 멀고 내 구두엔 편자를 박지 않았으니

너무 쉽게 닳아버리는 열망과 맹목 같은 것도 쉽게 전생이 되고

가슴을 흔드는 구름과 잎사귀는 늘 바깥에 있고

나는 이제 구만 구천 년째 마지막 학기

술집 건너 다시 비틀거리는 내생 저쪽에

박사로 가는 길이 뻔히 보인다

 

 

                     —웹진《시인불멸》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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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 / 1966년 경북 문경 출생. 1992년〈문화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상처적 체질』. 산문집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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