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아래 지진
전인식
일부러 해가 지기를 기다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을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누가 먼저 가자고 한 적도 없었습니다
바람이 내어준 길을 따라 갔거나
고양이의 후각으로 비릿한 무엇인가의 냄새를 맡았거나
아니면 구름속 숨은 낮달이 우리를 유인했는지 모릅니다
도시 끝자락에 있는 작은 공원엘 갔습니다
은행나무 아래에서 딱히 할 일도 없이 서성거리다가
어쩌다 마주하는 눈빛이 어색해질 때
붉어지는 서쪽 하늘 힐껏 힐껏 훔쳐보다가
서로의 가슴에 숨어 있는 수심의 깊이를 재어보다가
먼 훗날을 가늠해 보았는지도 모릅니다
하늘 한쪽 모서리에 은행잎 노란색으로 서로를 칠하다가
두 사람이 또 다른 한그루 은행나무로 섰을 때
갑자기 우르르 쿵쿵 땅이 흔들렸습니다
아찔한 현기증과 동시에 온 몸이 흔들렸습니다
다행히 서로를 껴안고 있었기에 넘어지지는 않았습니다만
태어나서 처음 하는 키스라 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지진이라 했습니다
나중 이십년쯤 지나갈 무렵에서는
태어나서 처음 느낀 오르가즘이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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