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
이정록
원고지를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사학년 때다.
"뭘 써도 좋다. 원고지 다섯 장만 채워 와라!"
다락방에 올라 두근두근, 처음으로 원고지라는 걸
펼쳐보니 (10 ×20) 이라 쓰여 있는 게 아닌가?
그럼 답은 200! 구구단을 뗀 지 두어 달, 뭐든
곱하던 때인지라 원고지 칸마다 200이란 숫자를
가득 써냈다 너 같은 놈은 교사생활 삼십년,
개교 이래 처음이라고 교문 밖 초롱산 꼭대기까지
소문이 쫙 퍼졌다 그로부터 십오년, 나는 작가가 되었다
지금도 글이 콱 막힐 때마다, 그 붉은 우물에서
두레박을 타고 이백이 솟아오른다 그때 나는,
이백과 같은 길을 걸어갈 거라는 막연한 운명을
또박또박 적어넣었던 게 아닐까?
'♧...참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징어 / 문인수 (0) | 2019.11.02 |
---|---|
단풍 / 박숙이 (0) | 2019.11.01 |
저녁의 맛 / 박남희 (0) | 2019.10.23 |
11월 / 나태주 (0) | 2019.10.23 |
봄에 소박하게 질문하다 / 엄원태 (0) | 2019.1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