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뿌리의 기억 (외 2편)/김광규

김욱진 2011. 6. 21. 15:53

뿌리의 기억 (외 2편)

 

   김광규

 

 

 

땅속이 캄캄해 너무나

답답해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저 굵은 소나무 뿌리들

슬며시 땅 밖으로 다리를

내밀었을까 처음 보는 햇빛

눈부셔 움찔 멈추는 순간 그대로

우불꾸불 굳어버렸을까 아니면

땅 밖으로 가출한 뿌리들

땅속으로 다시 불러들이기를

저 늙은 소나무가 잊어버린 것일까

등산객들에게 밟혀 반들반들

닳아버린 소나무 뿌리들

땅 위의 가벼움 참을 수 없어

끝내 땅속으로 되돌아가버린

뿌리들의 사춘기가 잠깐 땅 위의

기억으로 남은 듯

 

 

 

콕콕 꾹꾹

 

 

 

전화 다이얼 누르면 경쾌한

멜로디와 상냥한 여자 목소리

내선 번호를 눌러주세요

영업부는 1번

경리부는 2번

제작부는 3번……

이렇게 시작하여 시키는 대로

주민번호 비밀번호 온갖 숫자를

꾹꾹 눌렀어요

다이얼이 늦었으니 다시

걸어주세요 시키는 대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서

그 많은 숫자를

꾹꾹 눌렀지요

그래도 또 늦었다고 하네요……

숫자가 되어버린 침묵과 인내와 반복

아무 쓸모없어요

자동응답기의 재빠른 지시를

제대로 따라갈 수 없는

나의 느린 손

무딘 손가락……

몇 번이고 신속하게

접속을 차단하는 기막힌 서비스

갸름한 손끝으로 날쌔게

콕콕 누르지 못하면

모든 문의를 숫자로 바꾸게 할 뿐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는

완벽한 ARS

 

 

 

어제가 되어버린 오늘

 

 

 

귀에 익은 목소리 들린 것 같아

뒤돌아보니 저기서 그가 손짓하네

—오래간만이야

악수를 건네려고 반갑게 다가서보네

그러나 다가갈 수 없네

밀랍 인형처럼 한자리에 서 있는 그와

나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네

하룻밤 사이에 생긴 간격

어제가 되어버린 오늘

안타깝게 마주 바라보지만 우리는

서로 육성으로 말할 수 없네

유현한 시공 속에 잠시 공존할 뿐

기억의 강물 건너편에 그는 바위처럼 서 있고

나는 혼자서 자맥질하며 떠내려가고 있네

가위 눌린 꿈도 아닌데 지금

가슴 답답하고 숨 막히는 이곳에서

어제의 그 모습과 아쉽게 헤어지네

 

 

 

                                 —시집 『하루 또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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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규 / 1941년 서울 출생. 서울대 및 동대학원 독문과 졸업, 독일 뮌헨에서 수학. 1975년 계간 《문학과지성》을 통해 등단.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아니다 그렇지 않다』『처음 만나던 때』『시간의 부드러운 손』『크낙산의 마음』『좀팽이처럼』『물길』『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시선집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누군가를 위하여』, 산문집 『육성과 가성』『천천히 올라가는 계단』, 학술 연구서 『권터 아이히 연구』 등. 현재 한양대 명예교수(독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