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채널

해설-자연으로의 회귀와 윤회사상의 시적 전개

김욱진 2013. 10. 17. 20:22

           자연으로의 회귀와 윤회사상의 시적 전개

 

 

 시는 원래 희랍어로 인간의 영혼에서 발전해 나오거나 혹은 끌어내어 온 것(psychagoria)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의미와 함께 시는 도시적인 세련미와 규범적인 예법 그리고 보다 큰 이상적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다른 여러 가지 가치를 복합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그래서 시에 대한 요구 또한 분분하다. 시는 반드시 구체적인 현실에 바탕을 두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한 쪽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시는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와 관련된 상상력에 뿌리를 두어야만 된다고 말한다. 또 다른 어느 한 쪽은 시는 진리와 도덕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그와 다른 입장을 취하는 쪽은 시는 진리로 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뿐만 아니다. 한편에서는 시는 미(美)이고 즐거움이며 기쁨이라고 말하는가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진리를 미로 변형시키는 매체라고 정의한다.

 불교적인 연민의 시각으로 마비된 현대인들의 삶의 풍경을 그려온 시인 김욱진은 시를 쓰는 과정에서 위에서 언급한 어느 한 부분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처절한 경험과 비전 그리고 현실에 대한 비판적 통찰력으로 이루어진 그의 작품이 그의 손을 떠나 하나의 독립된 유기체로 존재할 때 위에서 언급한 다양한 스펙트럼을 모두 다 수용하고 있을 수 있다고 보고 싶다. 실제로 그는 그의 시집 구조를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진 건축물에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된 시집살이 석삼년에 벙어리 시마 찾아와 두 번째 시집 보내준다기에, 단숨에 용한 점쟁이 찾아가 캐물었다. 귀머거리한테 시집갈 팔자란다. 그놈의 팔자 거스르며 나랑 여태 동거한 암세포들, 지금 사는 집 확 허물고 이 세상 버려진 것들 다시 주워 담을 빈집 하나 지어 시상이나 줄줄 낳으며 노후 액땜하랜다. 옳거니, 부처님 말씀 몇 근 우려 주춧돌 박고, 일억 사천만년 묵은 우포늪 푹 고아 단청하고, 고스란히 떠도는 나의 업력 풀어헤친다. 어허야 둥기둥기 행복 채녈 돌린다.

 <시인의 말>이라고 쓴 위의 글에서 ‘시마’는 혼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고, 지금까지 살고 있던 집을 허물고 새 집을 짓는다는 것은 도덕성에 입각한 시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집으로서의 몫을 충분히 하고 있다는 느낌을 우리들에게 주고 있다. 또 스스로 진리라고 생각하는 불교적인 사상을 풍자적인 색채가 짙은 단정하고 세련된 언어로 변형시켜 표현하는데 아름다움이 있고 즐거움이 있는 것 역시 서두에서 필자가 언급한 시의 목적을 충족시켜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시집《행복 채널》의 주제는 <빈집>에서 볼 수 있듯이 불교의 윤회사상, 즉 ‘부처님 말씀’을 기초로 해서 더러움으로 오염된 인간과 자연 세계를 우포늪과 같이 생명이 살아 숨 쉬는 행복한 원시적인 상태로 복원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다. 부처의 시각에서 우주를 조감하고 있는 시인 김욱진은 윤회의 관점을 중시하며 숭엄한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는 현대인들의 어리석음을 고승(高僧)만이 사용하는 독특한 희화적인 언어로 갈파하고 있다. 그는 미물과도 같은 중생을 구하기 위해 영겁의 세월 동안 땅위에 꽂혀 꽃을 피우는 지팡이처럼 인내의 고행을 통해 열반의 세계에 오른 부처님의 말씀을 흠모하여 ‘낫살께나 먹은’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법문과 같은 조용하지만 위엄 있는 언어로 질타했다.

 

낫살께나 먹었다고

유세부리지 말고 살어

석가모니 할아버지 한번 봐

수 억 겁이 지나도

한결같은 목소리로

온 우주 품어 안은 채

가부좌 틀고 앉아 용맹정진하시잖아

밤이면 밤마다

태평양 베개 삼아

머리는 인도 쪽

가슴은 티베트 쪽

다리는 한국을 향하고 누워

와선도 하시잖아

누렁이 달팽이 나방이 하루살이 같은

사생(四生)들 다 모여드는 그런 밤이면

등허리 굽은 산보살도

지팡이 짚고 내려와

철야 무심범문 들으시잖아

—<지팡이 ‧ 1> 전문

 

 시인 김욱진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내용만이 아니다. 그는 여기서 우주의 모든 것이 부처님의 손위에 있듯이 부처님의 가르침과 함께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음은 물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성철 스님의 말씀처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자연의 순리에 따라 마음을 비운 상태에서 자신을 버리는 기다림의 미학을 갈구한다. 이러한 불교적인 진리는 <지팡이 ․ 2>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의상 스님

봉황산 중턱 잠시 머물다가

온다 간다 말 대신 꽂아둔 지팡이,

부석사 조사당 앞

골담초꽃으로 피어 계신다

여태

이슬 한 방울 받아먹지 않은 채

꼿꼿이 서서

내 주장자 물려받을

푸른 납자 어디 없냐고

할() 하시니

참나무 타고 내려온

다람쥐 보살

합장한 손에서 도토리 한 알

또르르 똑, 똑

—<지팡이 ․ 2> 전문

 

 위의 작품에서 김욱진은 신라의 고승 의상이 봉황산 중턱에 꽂아둔 지팡이처럼 흔들림 없는 기다림의 상태에서 얻은 결과를 ‘골담초꽃’의 아름다움으로 나타내고 있고, 또 그 진리를 그 주변에 서식하는 생물체에게까지 침묵 속에서 전파하고 교감하고 있다는 것을 법어에 가까운 자연의 소리로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불교적인 진리를 상징적인 이미지로 표현하려는 김욱진의 노력과 통찰력은 여기서 머무르지 않는다. 이를 테면, 그는 은빛 명주실을 뽑아내는 누에의 변신과정에서 불교의 윤회 사상에 대한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발견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뽕잎 공양을 하고

첫잠 든 개미누에

어둠의 동굴에 누워

윤회법문을 한다

이승저승 오고감은

한낱

성긴 발 위에서

몸 한번 바꾸는 일

알에서 깨어나

넉 잠을 자고

묵묵히 섶으로, 섶으로 기어올라

집 한 채 지었다 부서질

그 몸속에서

진신사리 같은

비단실 자아내며

훨훨

성자의 반열에 오를

저…

—<누에보살> 전문

 

 누에의 이미지에서 발견한 진실은 윤회사상에 담긴 하나의 생명체가 자연법칙에 따라 스스로 공양을 하며 변신해서 명주실과 같은 값진 결과를 얻는다는 것이다. 산업화를 주장하는 현대 과학은 눈에 보이는 실용주의적인 측면만을 강조하겠지만, 불교에서는 누에가 고치를 만드는 과정과 같은 탁월한 은유적 이미지로 표현된 윤회사상이 담겨있는 자연법칙을 훼손하는 것은 어리석은 파괴의 행위라는 것이 시인의 주장이다.

 현실적인 실용주의자들에게는 자비(慈悲)를 위해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윤회사상의 의미가 담긴 ‘길 없는 길’을 추구하는 것이 쉬운 일 같아 보이겠지만, 그것은 <지게>와 <눈>그리고 <박경리 묘소>등과 같은 그의 시편에서 볼 수 있듯이 눈에 보이는 노역(勞役)보다 더 어렵다. 그러나 그 속에 영겁의 시간을 이기는 평화로운 미소와 함께하는 위엄 있는 실존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그래서 김욱진은 현대 산업 사회가 세속적인 순간의 편의와 쾌락을 위해 신비스러운 우주의 질서가 숨 쉬고 있는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에서 벗어나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의 집을 짓기 위해 자연으로의 회귀를 위한 깃발을 조용히 들고 있다. 윤회 사상이 숨겨져 있는 자연법칙을 따르지 않고 세속적인 권력자의 욕망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순장을 한 무덤에 대해서 쓴 작품 <지산동 44호분>은 물론 기계 문명 속의 시간 흐름을 표현한 <전철 안에서>의 황폐한 풍경을 사실적인 서정으로 그린 다음, 그가 영겁으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도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우포늪을 노래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생태계가 살아있는 우포늪의 아름다움은 먼지 속에 질식할 것 같은 암울한 도시의 오염된 환경과 비교하면 실로 여유롭고 평화로우며 밝고 찬란하기까지 하다.

 불교적인 믿음을 갖고 있는 김욱진은 문명에 전혀 때 묻지 않은 완전한 생태계의 보고(寶庫)로서의 우포늪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보이고 있다. 그는 자연 스스로 가져오는 변화의 중요성을 말하기 위해, 오염 문제와는 거리가 먼 철새들이 날아와서 쉬고 가는 우포늪을 비행기가 뜨고 앉는 공항의 모습과 비유해서 그린 기지에 넘친 시를 쓰는가하면, 그곳에서 서식하는 청둥오리 가족들은 물론 차가운 얼음을 깨뜨리고 4월의 문을 열고 녹색으로 물든 봄의 혁명을 가져오는 자운영 등과 같은 식물들의 움직임을 상징적인 차원에서 특별히 조명하고 있다.

 

떠날 채비 서두르라는 푸른 함성이 온 늪에 깔린다

칼바람에도 서걱서걱 오만을 떨던 갈대가 입덧 같은 울렁증으로 비틀거린다

언덕배기 서서 정신을 놓아버린 왕버들은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눈 버쩍 뜬다

제 팔다리로 흐르는 물소리에 버둥대는 낡은 생각들

어디로, 어디로 숨겨야 할까?

더 채워야 할 것이 남았는지 철새들 날개 짓은 굼뜨기만 하다

물러선다는 것이

밀려나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일까

문득, 내 발밑에서 낄낄거리는 자운영 웃음소리

혁명일까

쿠데타일까

—<4월, 우포늪> 전문

 

 생명의 수원지로서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우포늪의 중요성을 그리고 있는 김욱진의 노력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우포의 만찬>, <우포의 혼> 그리고 <우포늪 깨우다> 등의 시편에서도 그것의 평화롭고 행복한 삶의 움직임은 물론 생명의 혼이 잠을 깨어 확대되는 의식(儀式)적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

 김욱진은 또 현대문명의 찌꺼기로 오염된 땅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우포늪마저 파괴될 조짐을 보이고 있음은 물론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일도 잊지 않고 있다. <우울한 우포늪>과 <우포 종합병원>그리고 <현대판 봉이 김선달>과 같은 시편에서 우포늪 생태계가 철새 떼들이 지구촌 먼 나라에서 실어온 바이러스로 위협 받고 있는 것에 대해 두려움과 우려를 나타내 보이며, 또 다른 청정지역에서 우포늪으로 날아온 청둥오리 떼들을 사냥총으로 죽이는 행위를 하는 잔인함을 신랄한 풍자로서 고발하고 있다.

 김욱진의 이러한 시적인 노력은 결국 근대화 물결에 의해 어린 시절에 친숙했던 전원 풍경은 물론 헐려지게 되는 옛집에 대한 향수를 그리는 작업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가 유년시절의 전설과 추억을 더듬는 것은 자칫하면 감상주의에 빠질 위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잃어버린 지나간 시절의 아름다움을 서사에 가까운 언어로 형상화하는 것은 과거를 위한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기쁨으로 넘쳤던 유년 시절의 삶과 그에 반하여 기계적으로 되풀이 되는 삭막한 도시적 삶을 비교하며, 산업화가 가져오는 편이적인 삶을 위해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자연환경을 파괴하는 어리석은 행위가 자행됨을 고발하기 위함이다.

 그 결과 그는 불교적인 연민의 시각에서 나타난 현상이지만 냉소적인 색채가 짙게 묻어 있는 언어로 생명의 집을 지어왔던 것과는 달리 <서해안 기름유출>,<새만금방조제>,<거가대교> 그리고 <천안함 침몰> 등과 같은 시편에서 볼 수 있듯이 과학 문명과 산업화를 통한 인간의 자연파괴 행위를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거듭 고발하는 풍자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김욱진은 외부적인 환경문제만 비판한 것으로 그의 시적인 노력을 끝내지 않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인간에 대한 자비로움과 도덕성이 상실된 냉혹한 사회 현실을 무서우리만큼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이 시집의 3부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시편들에서 김욱진은 ‘나의 업력을 풀어헤친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불교적인 구도(構圖)에서 시인 스스로 ‘업’이라고 말한 부분으로, 시인 자신의 개인적인 ‘업력’의 경험을 넘어 보편적인 현대인들의 아픔을 말해주고 있다. ‘나의 업력’이 앞서 간 사람들, 즉 조상들이 지은 죄의 결과로 온 번뇌와 고통을 의미하든 아니면 스스로 지은 죄의 결과로 오는 업보를 의미하든, 이들 시편들은 시의 영역에서 벗어나 산문의 영역으로 빠져 들어갈 위험마저 보이고 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의 비인간적인 상황 문제를 인간적이면서도 사회적인 차원에서 탁월한 은유와 지적인 언어로 묘사하는데 적지 않은 시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다.

 

우리 속에 갇힌 닭 한 마리

지붕 위로 날아올라

탈옥수처럼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폴짝폴짝 뛰어오르며

까치밥으로 남겨둔

감홍시를 쪼아먹는다

어느 새

벼슬이 판을 치는 세상

눈치를 보며, 나는

감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늦가을 오후> 전문

 

 <결빙>이라는 작품이 의미하는 것과 같은 문맥에 있는 위의 작품은 벼슬을 가진 수탉이 높은 곳을 상징하는 지붕에 올라가 까치밥으로 남겨둔 감홍시를 쪼아 먹는다. 이것은 시적인 효과를 약화시키는 다음 부분의 이미지를 읽지 않아도 강자가 약자에게 자비를 베풀기보다 약자의 것을 약탈하는 것을 은유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과 같은 부류에 속하는 <닳은 소리>는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의미에서 상징성이 매우 짙은 작품이다. 이 작품에 나타난 언어가 무미건조한 느낌을 주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오히려 비정한 현실의 억압 속에서 마멸되어가는 개체가 처해 있는 비극적 상황에 대한 거울의 역할을 탁월하게 나타내주고 있다.

 

마대자루 속에 처박아 뒀던

날개 잃어버린 선풍기

한 철 얼굴 마주한다

먼지조차 제대로 털어준 적 없는

너의 뼈마디가 얼마나 쑤시겠느냐

네 날개를 달고 태어났어도

주인 잘못 만난 탓에 활개 한 번 치지 못했으니

때로는 얼마나 바람피우고 싶었겠느냐

지울 수 없는 바람의 흔적

조용히 철망 밖에서 들여다본다

—<닳은 소리> 일부

 

 김욱진은 예술가인 시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부분인 도덕성을 잃지 않았다. 만일 그가 허무의식의 늪에 빠질 정도로 사회 비판적인 일에 지나차게 몰두하게 되면, 시의 본령인 에스프리 정신을 잃고 프로파간다의 수단으로 전락할 위험에 놓이게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칫 허무주의에 빠지게 만들 수 있는 불교의 윤회사상을 어둡고 우울한 현실 세계를 밝힐 수 있는 비전을 전달하는 채널 내지 수레바퀴로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윤회사상을 프레임으로 구성한 이 시집은 살아있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마비된 세계에서 고통스러운 업고(業苦)를 치룬 다음에는 자비롭고 생명력이 넘치는 밝은 세계가 온다는 것을 시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제 1부에 속하는 여러 시편들이 다양한 경험을 보이면서도 따뜻하고 밝은 면을 보이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구조적인 미학과 무관하지 않다. 작품 <연>은 시인이 유년 시절에 산 너머로 날려 보낸 종이 연에 대한 경험을 묘사하고 있지만, 이 작품에서 하늘 높이 산 너머로 날아가는 연과 그것과 연결되어 풀려나는 실타래의 이미지는 불교에서 말하는 이승과 저승의 유기적인 관계를 나타내주며, 위에서 언급한 사실을 다시금 확인해 주고 있다. <시계>, <幼年 情感>, 그리고 <줄다리기> 등과 같은 작품들은 황폐해진 고향의 살벌한 풍경을 그린 제 4부의 ‘슬픈 향수’에 귀속된 작품들과는 달리, 혈연으로 엮어진 개체는 물론 공동체의 유기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뿌리의 이미지와 관련지어 노래하고 있으며, 이것 또한 의식 또는 무의식적으로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불교적인 연기관(緣起觀)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의 주의를 요구하는 것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우울한 세계의 업고에서 벗어나 자연의 아름다움과 함께하는 행복했던 유년의 땅인 목가적인 세계로 돌아가려는 욕망을 담은 시적인 비전을 보이고 있는 결론 부분에 해당되는 일련의 시편들이다. 사랑과 희생 그리고 자비로 가득한 미래지향적인 밝은 세계를 향한 새로운 출발을 ‘비슬산 참꽃제’처럼 축하하고 노래하고 있는 것은 산업화가 가져온 기계문명으로 파괴된 죽음의 땅이 새로운 생명으로 눈부시게 부활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리라.

 

봄바람이 보내준

우리들의 합동 결혼 청첩장 받아보셨나요

혼기 놓친 처녀 총각 여러분

뻐꾹새 날아와

뻐꾹뻐꾹 뻑뻑꾹

축하 노래 부르는 비슬산

참꽃 합동 혼례식장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비슬산 참꽃제> 일부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시인 김욱진은 10년 넘는 세월을 보내면서 갈고 닦은 언어로 불교의 세계에 침잠해서 발견한 생명에 관한 도덕적 진리를 시적인 아름다움으로 표현하는데 남다른 재능을 보이고 있다. 물론 경우에 따라 시적인 언어의 높낮이가 절제의 미학 문제와 함께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고, 가끔 나타나는 거친 냉소주의에 의해 상처를 입고 있지만, 그가 놀라운 통찰력으로 발견한 탁월한 은유적 이미지를 통해 적지 않은 지적인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래서 앞으로 김욱진의 더 큰 시적 성공의 여부는 그의 주제의식을 지성과 감성이 어우러진 세련된 언어로 한 차원 더 높게 형상화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을 것 같다. 이것은 김욱진이 지금까지 추구하고 있는 예술적인 꿈과도 관련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또한 그가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의식적인 노력으로 포스터모더니즘 시각에서 타자(他者)인 자연의 중요성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부각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도 깊은 관계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허무적인 과거로 회귀하는 낭만적 감상주의로 빠지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면, 시적인 긴장감을 잃게 되어 지적 재산의 손실을 입을 수도 있다는 점은 지적해 두고 싶다. 이것은 물론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의 제 3시집에서 또 다른 시적인 변신을 보일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태동(문학평론가 ‧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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