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이 뚜렷하다/문인수 공백이 뚜렷하다 문인수 해 넘긴 달력을 떼자 파스 붙였던 흔적 같다. 네모반듯하니, 방금 대패질한 송판 냄새처럼 깨끗하다. 새까만 날짜들이 딱정벌레처럼 기어나가, 땅거미처럼 먹물처럼 번진 것인지 사방 벽이 거짓말같이 더럽다. 그러니 아쉽다. 하루가, 한 주일이, 한 달이 걸어놓.. ♧...참한詩 2018.02.01
11월의 어머니/윤준경 11월의 어머니 윤준경 11월 들판에 빈 옥수숫대를 보면 나는 다가가 절하고 싶습니다 줄줄이 업어 기른 자식들 다 떠나고 속이 허한 어머니 큰애야, 고르게 돋아난 이빨로 어디 가서 차진 양식이 되었느냐 작은애야, 부실한 몸으로 누구의 기분 좋은 튀밥이 되었느냐 둘째야, 넌 단단히 익.. ♧...참한詩 2018.01.30
액면가/윤준경 액면가 ​ 윤준경 나는 나를 늘 싸게 팔았다 아예 마이너스로 치부해 버렸다 내세울 게 없는 집안이라고 어머니는 말씀하셨고 나는 그 말에 육십년이나 절었다 그래서 나의 액면가는 낮을 수밖에 없고 때로 누가 나에게 제 값을 쳐주면 정색을 하며 다시 깎아내리곤 했다 자신의 액면.. ♧...참한詩 2018.01.30
장미/송찬호 장미 송찬호 나는 천둥을 흙 속에 심어놓고 그게 무럭무럭 자라 담장의 장미처럼 붉게 타오르기를 바랐으나 천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로만 훌쩍 커 하늘로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그때부터 나는 헐거운 사모(思慕)의 거미줄을 쳐놓고 거미 애비가 되어 아침 이슬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 ♧...참한詩 2018.01.30
다황을 긋다/이무열 다황을 긋다 이무열 마지막 다황공장 경상북도 의성의 '성광'을 아는가. 한때, 전국에 공장이 삼백 곳 넘었고 최초로 세워진 곳은 인천의 '대한'으로 일제 땐 한 곽에 쌀이 한 되였다는데 몰래 훔쳐가곤 했던 탓일까 인천에 성냥공장 성냥공장 아가씨 치마 밑에 감추고서 정문을 나설 때 .. ♧...참한詩 2018.01.29
완성되는 점들 외 1편/변희수 완성되는 점들 변희수 가령, 이런 점들은 언제나 안심이 된다 세계는 하나의 점으로 시작되고 하나하나의 점으로 점묘법을 쓰는 화가들처럼 나는 수없이 찍힌다 빨강옆에, 노랑옆에, 검정옆에, 섞이고 물든다 묽어진다 파랑새였던 나의 파랑이 점점 더 희미해져간다 파랑의 기억들로 부.. ♧...참한詩 2018.01.29
어떤 별리/장하빈 어떤 별리 장하빈 그 읍에는 닷새마다 우시장 선다 아래장터엔 땅거미 일찍 지고 팔려가는 송아지와 팔려가지 못한 어미 소가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 끔벅인다 목울대에 덜컥 걸리는 서산 노을 붉다 ♧...참한詩 2018.01.24
꼭지/문인수 꼭지 문인수 독거노인 저 할머니 동사무소 간다. 잔뜩 꼬부라져 달팽이 같다. 그렇게 고픈 배 접어 감추며 여생을 핥는지, 참 애터지게 느리게 골목길 걸어 올라간다. 골목길 꼬불꼬불한 끝에 달랑 쪼그리고 앉은 꼭지야, 걷다가 또 쉬는데 전봇대 아래 웬 민들레꽃 한 송이 노랗다. 바닥.. ♧...참한詩 2018.01.23
적소단장謫所短章ㅡ골방에서/심강우 적소단장謫所短章ㅡ골방에서 심강우 시를 쓴다고 방을 나가지 않은 날이 많았다 걱정하는 사람의 말이 달개비 꺾이는 소리로 번졌다 더러 내가 흩어 놓은 말들이 구름을 이루고 떠돌다 한낮의 소나기로 다녀갔으나 처마가 깊어 젖지 않았다 한갓되이 울 밖의 소문에 귀를 담그지 않으리.. ♧...참한詩 2018.01.17
내 고향/오탁번 내 고향 오탁번 삽살개도 처마 밑 그늘 찾아 낮잠 자는 곳 장독대 항아리로 뛰어오르는 청개구리가 고개 떨군 해바라기 잎사귀로 숨어드는 곳 천둥산 너머 먹구름 몰려와서 여우비 한 줄기 뿌리면 살구나무가지에서 매미들이 잠들고 저녁쌀 구하러 간 어머니는 아직도 오지 않아 누룽지.. ♧...참한詩 2018.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