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작

비슬산 사계

김욱진 2010. 5. 23. 22:29

           비슬산 사계

-비슬산11

 

 

 

산이란 산은 나이가 들수록 맑고 향기롭다 가파른 만큼 높고 푸른 산은 돌을 갈아 밭을 매고 별빛 쪼아 군불 지피는 사람들을 제 품에 살게 하고, 떠나보낸다

 

진달래 산천에 고인古人들 돌아와 옛날 옛적 숨겨둔 사랑 찾아 헤매다 솟대처럼 불쑥 솟은 바위틈 양지 녘에 수줍은 연분홍 눈빛으로 다보록이 모여 앉아 산거울 조록싸리 오목눈이 꾀꼬리 연달래 안부 물으며 웃음꽃 활짝 피운다 왕진달래 털진달래 반들진달래

 

굴참나무 가지 사이로 여름 산 마주하고 앉은 노랑 할미새 물오른 고로쇠나무의 가슴 울려 목줄 한번 축이고 어린 산비둘기 불러 모아 옛사랑 얘기 들려준다 깜빡 졸다 눈뜬 멧새도 가만 엿듣는다 허공으로 벙어리매미 한 마리 날아간다

 

산비탈 굽이굽이 돌아올라 발길 머문 텅 빈 대견사지*, 주춧돌 언저리 흩어져 앉은 스님바위들은 아직도 묵언정진 중이다 천년의 넋을 달래며 탑돌이 하는 갈바람의 발걸음만 분주하다 허연 가사장삼 걸치고 무심히 법문하는 억새풀 머리맡으로 새털구름 지나간다

 

양수 속에 둥둥 떠 있는 태아처럼 계곡마다 비스듬히 웅크리고 앉은 고만고만한 바윗덩어리들, 겨울 와 눈이라도 맞으면 어미 자궁 한 모퉁이 휘돌아 두발 곧추세우고 산봉우리로 올망졸망 떼 지어 걸어 올라오는, 남극의 펭귄 같다

 

달빛 어린 비슬산琵瑟山

등성이마다

거문고 줄 잡아당기는

한갓진 물소리 바람소리 솔방울 웃음소리

 

 

*대견사지 : 대구시 달성군 비슬산 자락에 위치한 신라 때 지은 절로 임란 때 소실됨

 

 

 

                           (시인정신 2005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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