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날의 잔상2
어릴 적 나는
재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박 넝쿨처럼 몰래 담벼락 타고
지붕으로 살살 기어 올라가
폭 삭은 지푸라기 만지작거리며
어렴풋 아버지의 목소리를 흉내내었지
봉당 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햇나락 쭉정이 키질하시던 할머니
풀죽은 목소리로
“애비야, 올 추석엔
박 속이라도 삶아먹어야겠구나.” 하시며
목숨과도 같은 박 덩어리, 아니 福 덩어리
하나, 둘 손 세어 헤아리셨지
마당 저편에 사뿐히 내려앉은
참새 한 마리
좁쌀 몇 알 주워 물고
태아처럼 옹크린 내 엉덩이만
애꿎게 바라보는 가을 오후
빈 둥지 홀로 둔
제 피붙이가 못내 눈에 밟히는 듯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는
왜 그리 크게 들렸는지
송골송골 땀방울 맺힌 박 한 덩이
술래 눈길 피하려던 순간
(시문학, 2005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