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작

가난한 날의 잔상2

김욱진 2010. 5. 23. 22:45

가난한 날의 잔상2

 

 

 

어릴 적 나는

재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박 넝쿨처럼 몰래 담벼락 타고

지붕으로 살살 기어 올라가

폭 삭은 지푸라기 만지작거리며

어렴풋 아버지의 목소리를 흉내내었지

 

봉당 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햇나락 쭉정이 키질하시던 할머니

풀죽은 목소리로

“애비야, 올 추석엔

박 속이라도 삶아먹어야겠구나.” 하시며

목숨과도 같은 박 덩어리, 아니 福 덩어리

하나, 둘 손 세어 헤아리셨지

 

마당 저편에 사뿐히 내려앉은

참새 한 마리

좁쌀 몇 알 주워 물고

태아처럼 옹크린 내 엉덩이만

애꿎게 바라보는 가을 오후

 

빈 둥지 홀로 둔

제 피붙이가 못내 눈에 밟히는 듯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는

왜 그리 크게 들렸는지

송골송골 땀방울 맺힌 박 한 덩이

술래 눈길 피하려던 순간 

 

 

 

            (시문학, 2005년 5월호)

 

 

 

 

 

'♧...발표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룡, 발자국   (0) 2010.05.23
선방에서  (0) 2010.05.23
현해탄을 건너다  (0) 2010.05.23
가난한 날의 잔상1   (0) 2010.05.23
꿈속의 어린왕자  (0) 2010.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