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시인들
시인 이태수
문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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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이태수 | 세상이 너무 어수선하다. 현실도피라도 하듯이 한동안 거의 칩거하면서 세 시인의 시집 해설을 쓰는데 시간을 쏟아 부었다. 요즘 시인들은 어떤 생각에 무게중심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지 살펴볼 기회가 되기도 했다. 장인이 코끼리 다리를 더듬으며 그 형상을 상상하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그 의미가 결코 가볍지만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세 시집은 박영호의 '바람에게 길을 묻다', 김욱진의 '참, 조용한 혁명', 김교희의 '소리에 젖다' 등이다. 이 시집들의 공통분모는 더 나은 삶을 향한 자기성찰과 그런 세상 꿈꾸기지만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그 빛깔과 무늬들이 각기 다르다. 세상은 크게 바뀌었다. 물질적으로는 궁핍해도 정신문화를 숭상하던 옛날 정서와는 달리 배금주의, 물질주의가 만연하는 오늘의 세태 속에서 시인으로 살아가기란 안팎의 소외감과 박탈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더구나 오늘날 시인의 길은 돈과는 물론 명예와도 거리가 멀고, 그 사정이 나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형국이다. 박영호의 발길은 주로 자연이나 역사적 배경을 거느리는 명소, 사람들이 어우러져 사는 풍경 속으로 이어지지만, 때로는 외부를 향한 듯 내면을 파고드는 자기성찰에 무게가 실린다. 세태를 희화화하면서 직설적으로 풍자하고 야유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자성으로 눈길을 돌려 연민과 사랑, 베풂의 정서를 환기하는 휴머니티가 관류한다. 그의 경주 깃들기와 끌어안기는 사라졌거나 모습이 바뀌어가는 불교문화유산들과 그 유산들이 거느리는 정신적 높이와 깊이에 대한 그리움과 우러름, 애틋한 연민을 동반한다. 연작시 '경주에 가다'는 그런 마음의 밝음과 어둠(그늘)의 무늬와 빛깔들을 다채롭게 떠올린다. 그냥 구경거리만 될 뿐인 낡고 금 간 종을 보면서 "울지 못하는 자신을 향한 분노는/퍼런 녹이 되어 삭고 있다"고 그 소멸의 비애를 스스로의 분노로 해석한 '경주에 가다 5'나 돌밭에서 이름만 남은 절터를 지키고 있는 '일그러진 석불'과 마주치며 "삭은 몸통과 일그러진 얼굴이/설법을 대신하는" 것으로 읽고 있는 '경주에 가다 6'도 천년고도가 품고 있던 찬란한 불교문화와 그 정신적 높이에 대한 시인의 짙은 그리움과 연민, 세월의 무상과 허무감을 투영하고 있다. 김욱진의 시는 더 나은 삶을 향한 자기성찰과 자기탐구에 무게중심이 주어지지만, 사회학적 상상력을 근간으로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파토스들을 희화화하거나 해학적으로 떠올린다. 말이 말의 꼬리를 물거나 능청스럽고 의뭉한 기지로 번득이는 어조가 강한 인상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그 어떤 경우도 거의 어김없이 궁극적으로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열어 보이려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는 시인으로 살아가는 비애와 시가 소외되는 현실을 자장면 값에 빗대어 자조적으로 토로한다. 굶으면서까지 자장면 세 그릇 값으로 시집 한 권을 사던 가치관 탓으로 시인이 된 그가 시인으로서는 신세타령만 하는 비렁뱅이로 살아가야 한다는 비감에 젖게 하는 건 그 당시가 시집 한 권 값이 지금의 세 배나 됐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실제 그는 어느 시낭송회에서 그런 세태를 절감해야 했다. '참꽃시회'에서 옛 노래 공연이 끝나자 공연장을 가득 메웠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시들시들해진 참꽃처럼/시인들만 소복 모여 앉은" 광경을 목도해야 했다. 하지만 시인은 숙명처럼 시를 쓰면서 비애와 연민을 삭여야 한다. 그의 기대와 소망은 시의 진정한 독자를 향한 것이면서도 정신문화의 가치 회복을 겨냥한 절절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김교희의 시는 단아하고 정결하며, 섬세하고 미시적인 시각으로 대상을 감각적으로 포착하는 서정적 자아가 빚어내는 결과 무늬들이 진솔하면서도 다채로운 빛깔을 띤다. 아무데서나 잘 자라는 풀이 피우는 꽃(풀꽃)을 두고 "이름 없어도 눈웃음 짓고/곱지 않아도 기죽지 않아"('당당화') 당당하다고 예찬한다. 이 예찬은 소외되고 그늘진 사물들에까지 각별한 연민과 사랑을 끼얹는 시인의 휴머니티을 보여준다. 그의 적잖은 시편들은 결국 홀로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과 그 때문에 빚어지는 사랑의 아픔과 기다림, 그 기다림과 아픔 때문에 더욱 절절해지는 그리움의 정서를 곡진하게 노래하고 있다. 시인이 인간을 향한 정념을 가라앉히면서 자연과 가까이 교감할 때는 긍정적인 사유로 자연의 섭리에 겸허하게 순응하고, 삶을 너그럽게 관조하면서 무상이나 무위까지도 따뜻하게 끌어안고 있다. |
-경북신문 기자 / 입력 : 2016년 10월 31일